읽고본느낌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샌. 2018. 4. 30. 08:49

이기호 작가의 '가족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가족의 실제 삶을 정감있게 보여주는 글 모음이다. 2011년부터 월간지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슬며시 미소를 띄게 되다가도 찡해지는 순간이 많다.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삶의 애환이 맛깔스런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며 살아가는 마음씨가 곱다. 글 한 편 한 편이 예쁜 삽화 같다. 책의 처음에 적힌 한 문장이 오래 눈길이 간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글 하나를 옮긴다. 이 책 제목으로 인용된 내용이 들어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까지도 책 제목을 착각했다. '여든'이 아니고 '여름'이라니, 나도 여덟 살 꼬맹이에 다름 아니다.

 

 

여름이 되면

 

올해 여덟 살이 된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이가 하나였다면 조금 달랐을까?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막내와 하루 내내 발탄강아지처럼 온 집 안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다섯 살짜리 둘째를 챙기다 보니, 어느 날 말 그대로 벼락같이 첫째 아이의 취학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다. 다른 유치원 친구들은 영어를 배운다, 수학 학원을 다닌다, 엄마 손을 잡고 이곳저곳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우리가 아이에게 가르친 것이라곤 태권도 학원 석 달, 딱 그것이 전부였다. 아직 한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데 어쩌나(숫자는 그래도 이십까지는 무난하게 센다. 그 뒤론 그냥 다 '엄청 큰 숫자'다). 아내는 취학 통지서를 받아들곤 대뜸 그 걱정부터 늘어놓았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초등학교 들어갈 땐 이름도 못 썼어. 학교 가서 배우면 되지, 뭐."

나는 발톱을 깎으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첫째 아이는 파워 레인저 가면을 쓴 채 계속 소파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 열심히 놀아라.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고생이 시작되니..... 나는 계속 그런 심정이었을 뿐 걱정이라곤 하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한 건, 지난달 초순 아이와 함께 초등학교 예비 소집에 다녀온 직후였다. 둘째와 막내를 돌보는 아내를 대신해 첫째 아이와 함께 집에서 십오 분 거리인 초등학교까지 걸어갔는데(걸어가면서 나는 계속 아이에게 첫 여자 친구의 중요성과 어떤 포즈를 취해야 여자들에게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가 따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단순하게 출석만 확인하는 것이겠지 생각한 내 예상과 다르게 책상에 앉아 선생님과 꽤 오랜 시간 면접까지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아이의 신상명세서를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나는 아이의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아이는 아빠 이름, 엄마 이름을 묻는 선생님의 질문엔 정확하게 대답했지만, 살고 있는 주소를 묻자 엉뚱하게도 알고 지내는 교회 집사님의 아파트 이름을 대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져 "아하하, 저희가 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요..."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선생님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은 다음, 다시 아이를 향해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그러곤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말했다. 첫째 아이는 마치 시력이 나쁜 아이처럼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이, 이..." 하다가 이내 도리질을 쳤다. 다음 질문은 덧셈 문제. "팔에다 오를 더하면 몇일까?" 선생님의 질문에 첫째 아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청 큰 수요!"

나는 차마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어 푹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그래도 입학 전에 한글은 떼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아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부터였던가, 직장에서 돌아와 보면 아이는 엄마와 식탁에 앉아 '어린이 전래동화'나 '어린이 속담집' 같은 책들을 큰 소리로 읽느라 내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금 서운했지만 웬일인지 마음이 더 편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한글만 뗀다면, 나는 그러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보름 전 첫째 아이와 함께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불쑥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빠, 내가 오늘 책에서 읽었는데, 세 살 버릇이 언제까지 가는 줄 알아?"

나는 속으로 '제법이네. 이제 학교 가도 문제없겠네'라고 생각했다.

"글쎄? 언제까지일까?"

나는 아이 쪽으로 모로 누우면서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는 예의 그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말이지.... 여름까지 간다!"

나는 잠깐 아랫입술을 깨문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그래, 여름까지 가자. 여름까지 놀면 그만큼 키도 클 거야. 나는 말없이 첫째 아이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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