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안녕 주정뱅이

샌. 2018. 5. 5. 12:54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봄밤' 등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책 제목처럼 주정뱅이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이다. 작가 자신도 대단한 애주가인 듯하다. 또한 우리는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일정 부분 주정뱅이와 닮았다. <안녕 주정뱅이>에서 '안녕'이란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따스한 인사말 같다.

 

이 책에 모인 작품들은 공통되는 색깔이 있다. 인생의 고통과 비극을 드러낸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살면서 맺어야 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생채기를 남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자체가 고(苦)의 원인이다. 견뎌내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무게가 버거워 지쳐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병든다. <안녕 주정뱅이>에는 인간에 대한 슬픈 연민이 깔려 있다.

 

일곱 편 중에서 제일 관심을 끄는 작품은 '이모'다. 어머니와 남동생을 돌보느라 결혼도 못 하고 가장 역할을 한 이모의 이야기다. 남동생은 도박을 하느라 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졌다. 빚을 갚고 어머니를 부양하느라 20년을 보낸다. 그래도 어머니와 동생은 끝없이 돈을 요구한다. 나이 50이 되어서 이모는 집을 나간다.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서다.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2년 동안 이모는 세상과 단절한 채 소박하게 살며 자유를 누린다. 이모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마지막 2년마저 없었으면 이모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했을 것인가. 이모를 옥죄인 굴레는 이모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명이 그렇게 주어졌는지 모른다. 불행은 막무가내로 개인에게 덮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고통을 감내하며 대응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대응의 수단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은 철저히 피동적인 존재다. 그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인생은 어릿광대가 지껄이는 헛소리인지 모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비극은 '인생의 악희(惡戱)'일 뿐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왜 나냐고, 따지거나 넋두리해도 소용 없다. 우리는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다. 연민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유대감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제일 큰 힘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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