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해 쓸 의무가 있다." 이기호 작가가 한 말로 기억한다. 작가의 글에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살이의 애틋함이 녹아 있다. 이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대머리 독재자가 등장한 1980년대가 배경이다. 1982년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은 지학순 주교가 있던 원주로 피신한 뒤 자수했지만, 수사 당국은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다. 이때 택시 운전사였던 나복만은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이 사건에 엮이게 된다. 교통사고로 경찰서를 찾게 되었는데, 실수로 그의 이름이 사건 관련자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독재 시대 때 흔했던 용공 조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소설은 미친 시대에 한 인간이 무참히 파멸되어 가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잔인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나복만의 답답한 대응 방식을 비롯해 시대의 광기에 숨이 막힌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는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가벼우며 희극적이다. 그래서 쉽게 읽힌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웃어줄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소설 첫머리가 '들어 보아라'로 시작하는데 이런 어조는 끝까지 유지된다. 마치 슬픔을 노래로 풀어내는 타령 같다.
그런데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제목에는 의문이 든다. 왜 '차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까? '차남'의 상대편에 '장남'이 있는데 '장남들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여기에 대해 잠깐 언급한 말이 소설 중간쯤에 나온다.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는 제 할 일에 충실한 안기부 요원들이 나온다. 가정에서는 믿음직한 남편이고 다정한 아빠다. 그러나 아무 죄책감 없이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하고 간첩으로 만든다. 악은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도 공무원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평범한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한다.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은 결국 숨어 버렸다. 주인공은 착하고 순박하다. 너무 착해서 답답하기까지 하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의 삶이란 우습고 허전하다. 어릿광대의 한 토막 농담 같다. 주인공이 저항의 몸짓이라도 보이길 바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또한 그의 길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