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샌. 2024. 10. 8. 11:08

3권으로 된 박지리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무대는 1지구부터 9지구까지 철저하게 신분으로 갈라진 세계다. 각 지구간에는 제한된 왕래만 가능하고 서로를 침범할 수 없다. 1지구는 온갖 혜택을 누리는 파라다이스지만, 9지구 주민은 겨우 생존해 나가는 폐허가 된 세계다. 신분이 세습되는 가상의 세계지만 이미 계급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구조라고 누구나 느낄 것이다.

 

1지구에는 최고의 엘리트만 갈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이 있다. 주인공인 다윈 영은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학생이고, 아버지 니스는 문교부 차관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소설에는 니스, 버즈, 제이의 세 친구가 나오고 후대로 이어진 친분은 십대인 다윈, 레오, 루미의 얽힌 관계를 틀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30년 전에 살해된 제이 삼촌의 비밀을 캐기 위해 루미가 나서면서 60년 전 9지구에서 일어난 '12월의 폭동'과 관련이 있음을 눈치챈다. 제이의 죽음에는 대를 이은 배신과 진실에 대한 은폐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다윈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작가는 다윈을 통해 인간 내면에 도사린 근원적인 악의 모습을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그 바탕에는 핏줄의 이기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추리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다윈의 변신이 슬프지만 어른이 된다는 게 그런 건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악과 타협하고 진실에는 눈을 감아야 하는지 모른다. 반골적인 기질을 가진 인물들도 거대악 앞에서 이용물이거나 희생양이 된다. 버즈가 의욕적으로 만든 프라임 스쿨 다큐멘터리가 결국 찬양으로 끝난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도 레오는 제2의 제이가 되었다.

 

다윈이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영 가문은 몰락하고 잠시 파문이 일겠지만 지배층은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이용해 먹을 것이다. 인간은 악의 시스템에 길들여지면서 진화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기원의 뿌리는 깊고 아득하다.

 

두꺼운 장편소설이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작가의 대표작이면서 유고작이라고 한다. 재능 있는 소설가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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