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란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일상에서는 절대 접촉하지 못할 사람을 책에서는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사적인 대화도 가능하다. 내 질문에 저자는 책의 어디선가에서 꼭 답을 해 준다. 물론 귀로 들을 수는 없지만.
<해방촌의 채식주의자>를 쓴 전범선 씨는 특이한 이력과 함께 별난 삶을 산다. 학력은 상위 0.1%라고 할 정도로 화려하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을 거쳐 컬럼비아 로스쿨까지 합격했다. 엘리트 계급에 진입하고도 남을 스펙이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밴드를 만들어 기타를 잡고 노래를 한다. 그뿐이 아니다. 폐점 위기에 몰린 인문학 서점을 인수해서 살리고, 해방촌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하며 동물 보호와 기후 위기를 막는 운동에 앞장선다.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란 책 부제처럼 틀에 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저자가 일관되게 지향하는 것은 자유다. 자유롭고 싶고, 눈치 안 보고 싶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누구나 그런 념을 품을 수는 있겠으나 전범선 씨는 용기 있게 박차고 나갔다는 점이 다르다. 삐딱하게 보면 제 멋대로, 꼴리는 대로 사는 삶이다.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저자의 사진을 보면 전봉준을 닮았다. 그의 표정과 눈동자에서는 혁명과 반역의 기운이 발산한다. 그의 노래 제목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꿈꾸며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간다.
이 시대의 젊은이를 '부유(浮遊)세대'라 표현한 점이 흥미로웠다. 한국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년 세대 전체가 아니라 전범선 씨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로 들렸다.
"결혼, 집, 출산, 경력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게 아니다. 나름의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표류와 부유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구조해주는 게 맞지만, 후자는 내버려두는 게 좋다. 부유세대는 침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떠다닌다.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아와 비아의 경계를 넘나든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정처 없는 유랑길에 목적지란 있을 수 없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도 없고 천국이나 극락도 없다. 하루하루 의미를 찾아가는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적 존재다. 고양이의 표정에서, 잠깐의 산책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에서 이유를 얻는다. 오늘 당장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대성공이다."
그는 채식주의자로 산다. 채식주의는 폭력과 차별, 억압을 반대하는 그의 주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 중에 <채식주의자>가 있는데 채식은 폭력을 부정하는 상징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비거니즘은 동물권 보호, 기후 위기, 나아가 패미니즘과도 관련이 있다. 아마 전범선 씨는 자본주의 위기의 극복을 채식을 통해 찾으려는 것 같다. 책에 나온 채식에 관한 다큐멘터리 '게임 체인저'를 넷플릭스에서 찾아봤는데 채식이 개인의 건강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완전한 채식은 못 하더라고 육식을 줄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는 전범선 씨는 21세기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을 외치지만 결코 자기만의 자유와 향락이 아니다. 내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자의 자유와 해방도 중요하다. 그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독립문화 만세'라는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른 즈음에 성균관과 해방촌에 터를 잡았다. 10년 뒤, 불혹이 되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글을 쓰고 있을지, 노래하고 있을지, 사업을 하고 있을지, 운동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없다.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독립적이고 자유롭다면,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계속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운다. 휘뚜루마뚜루 마냥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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