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작가의 '시적 산문'을 한 이유로 꼽았다. 시적 산문이라는 특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작품 <흰>이 아닐까 싶다.
<흰>은 2016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과연 <흰>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이기보다는 시 같고 수필 같은 작품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플롯도 분명하지 않다. 기존 소설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채식주의자> 같은 거부감도 들지 않은, 제목대로 하얀 도화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이다.
마침 첫눈이 내리는 날 이 소설을 읽었다. 눈을 떼고 창밖을 보면 하얀 눈이 대지를 소복하게 덮고 있었다. 책과 잘 어울리는 날씨였다. <흰>은 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지낼 때 쓴 소설이다. 2차세계대전 때 폐허가 되었던 도시의 흔적을 보며 작가는 삶의 고결함과 숭고함을 느낀 것 같다. 또한 소설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작가의 언니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언니가 살았다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흰'이라는 말 속에는 삶과 죽음, 상실과 덧없음에 대한 모든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흰색이라고 하면 모든 빛의 스펙트럼이 녹아있는 총합이다. 색깔을 더하면 검은색이 되지만, 빛을 더하면 흰색이 된다. 흰색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흰'은 단순히 깨끗하거나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흰' 속에는 삶의 슬픔과 애환이 모두 들어 있다. 상실에 대한 애도의 차원을 넘어선 신비와 경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만물과의 연결성 및 어떤 포개짐을 말한다고 나는 읽었다. 우주에 독립적인 존재란 없다. 소설의 기본 어조는 담담한 애조를 띄고 있지만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긍정이 '흰'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학교에 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측은하면서도 따스한 시선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모든 흰'이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지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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