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도중에 윤석열의 황당한 비상계엄 선포가 있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나라를 어떻게 절단 내는지 생생하게 보고 있다. 반면에 이 책에서는 김대중이라는 큰 정치인의 모습이 대비되어 빛나 보였다.
우리나라 국민이 제일 좋아하는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올해 조사에서는 31%의 지지를 받았다. 그 뒤를 박정희, 김대중이 따른다. 이것은 정서적 선호도가 크게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능력이나 인품면에서 제일 뛰어난 대통령은 김대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2006년부터 1년여에 걸쳐 대통령을 인터뷰한 내용을 풀어쓴 것으로 올 여름에 한길사에서 펴냈다. 전기나 평전과 달리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 바로 옆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마주하며 숙연한 감도 들었다. 그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신념, 불의에 저항했던 불굴의 용기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김대중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한다.
둘째, 정치인은 국민의 반보(半步) 앞에서 국민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현 대통령인 윤석열을 보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 같다. 김대중이 말하는 덕목은 찾아볼 수 없다. 장님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꼴이다. 그나마 가만히 있으면 다행인데 미쳐 날뛰고 있으니 큰일이다. 국민이 끌어내릴 수밖에 없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중에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우리나라를 지식정보와 문화 강국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분의 선견지명이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1981년에 감옥에서 <제3의 물결>을 읽고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상했다는 점을 책에서 여러 차례 밝힌다. 나도 비슷한 시기에 <제3의 물결>을 읽었지만 토플러의 주장에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난다. 허나 그분은 달랐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컴퓨터를 잘 사용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그때 이미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실제로 컴퓨터 보급, 정보인프라 구축, 전자정부 구성 등을 중점 사업으로 키웠다. 김대중 정부 당시에 교사들에게도 개인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그분이 60년대부터 내세운 3단계 통일론, 4대국 안전보장론, 대중경제론은 높은 식견에서 나온 시대를 앞선 정책이었다. 박정희나 전두환에 의해 빨갱이로 몰리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한다'는 평소 말처럼 정치 보복을 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으로 있을 때는 8번의 영수회담을 가지며 야당과 대화했다. 타협과 소통 역시 그분의 정치 철학이었다.
외교 분야의 뛰어난 성과도 돋보인다. 북한에 대해서는 햇볕정책과 함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미, 일, 중, 러와도 긴밀한 관계를 만들면서 한반도 평화 외교를 펼쳤다. 노벨상 평화상을 받는 등 대통령의 국제적 위상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 시드니 올림픽 남북 공동입장, 남북간의 특사 방문 및 국방장관 회담 등도 그 시기에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정치지도자는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가 옳은 결정을 하면 우리 사회에 큰 이득이 되고, 잘못된 결정을 하면 우리 사회에 큰 불행이 됩니다. 정치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위대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후배 정치인에게 주는 이 말에 자꾸 한 사람이 어른거려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