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에 도전하지만 전세는 기울어진다.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인 강제 징용과 징병제를 실시한다. 요주의인물에 대한 예비검속령으로 김길상, 서의돈, 유인성, 선우신 등이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숨 죽이며 사태를 관망한다. 일제의 패망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쭉 그래 왔지만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방관자로 살아간다. 민족의식을 가진 지사들은 대부분 시대의 제물이 되어 망가진다. 17, 18권에 나오는 여옥과 명빈이 대표적이다. 둘은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폐인이 될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몸이 점차 회복된다.
<토지>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인물은 2, 3세대가 주역이 된다. 자주 나오는 인물이 길상 아들인 환국과 윤국, 용의 아들 홍, 관수 아들 영광, 강쇠 아들 휘, 한복 아들 영호 등이다. 대체로 아버지의 뜻이 후대로 이어진다. 두 권에서는 해도사와 소지감이 있는 지리산이 정신적인 주요한 역할을 한다.
각자 사연이 다른 네 쌍의 남녀간의 사랑이 애틋하다. 인실과 오가타, 양현과 영광, 여옥과 상길, 모화와 몽치다. 그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인물은 몽치다. 몽치는 성장한 삶 그대로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거침없기도 하다. 몽치가 선택한 여자는 억눌리며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모화다. 서러운 사람만이 서러운 사람을 품을 수 있다. 그걸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몽치는 달랐다. 결혼을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으려는 타산적인 세태에 경종을 울린다.
형제간인 두만과 영만의 정반대 행로가 선악의 대비 구도로 전개된다. 해방이 되면 두만의 신세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이미 자신의 행태를 후회하는 듯하지만 과보를 받자면 아직 멀어 보인다. 시절 영화를 천년만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운 표현을 하나 배웠다. 두만이 모친과 호야할매가 나누는 대화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심장이 상해도 호미 자루 하나 들고 밭에 나가믄 시름도 잊고 노래를 부르니 누가 뭐라 하나, 또랑물에 얼굴 씻고 일어서믄 살 것 같앴는데... 철만 바뀌어도 눈앞에 들판이 선하게 떠오르고 바람난 제집겉이 갈 발을 잡을 수 없고."
"그거 다 일에 넋이 들어서 안 그렇나."
"일에 넋이 들다니요?"
"바느질쟁이 삯일 놓고 있이믄, 또 도부꾼이 도붓길에 나서지 않으믄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못 견디는 법이라, 변걸증이 나고, 그기이 다 일에 넋이 들어서 그런 기다."
이 대화를 보면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야 사는 것 같다고, 답답한 가슴이 뚫린다고 하시는 어머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이런 어머니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는데 적확한 말이 나타났다.
"일에 넋이 들어서 안 그렇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