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면서 감성을 잃지 않고자 젊은 여성의 글을 일부러 찾아 읽는다. 이 책도 그렇게 해서 서가에서 골랐다. 지혜 작가가 쓴 에세이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 함께 있어 좋았다. 작은 빛을 찍은 사진이 많았다. 책을 다 읽은 뒤 사진만 따로 음미하는 느낌이 좋았다.
'인사는 잠깐인데 우리는 오래 헤어진다'라는 제목에 가족의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어 가슴 아팠다. 작가는 부모가 있음에도 고모 손에서 자랐다. 낳은 부모, 기른 부모를 경험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작가의 글이 오롯이 담고 있다. 쓸쓸하면서 따스한 풍경들이다. 살아간다는 일이 그러하듯이.
책을 읽으면서는 자주 시선이 돌려져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글 일부를 옮긴다.
- 어젯밤 버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우는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 그건 청승이 아닌 것 같아. 굵은 눈물 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가 굴러떨어지는 아픔인 거지. 아파 본 사람들은 아픈 사람의 들썩이는 어깨를 알아본다.
- 어제는 길을 걷다가 남의 집 담장 사이로 삐져나온 꽃나무를 구경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걸면서 오른쪽 어깨에 작은 꽃잎 하나가 조용히 업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거실에 있던 달력을 넘기면서 사인펜으로 할머니의 기일에 표시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난 이후에 나는 이길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이따금씩 사람의 무릎에 엎어져 서럽게 울고 싶어도 매일 서럽기만 할 수도 없어서 고모와 나는 금세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동그렇게 된 배를 어루만졌다.
- 울음도 웃음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그치기 마련이라 울 수 있을 때 울고, 웃을 수 있을 때 웃는 편이 좋은 것 같아요.
- 짧은 단어 하나가 많은 불행을 상기시킬 때가 있잖아. 그럴 때는 그냥 바라보는 거야. 물속을 동동 떠다니는 기포들을 보듯이. 어떠한 목적도 무게도 없이. 한 번 바라보고, 지나가는 거야.
- 며칠 전이었다. 그날은 400년 만에 목성과 토성이 만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만남을 다시 보려면 지금으로부터 6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인터넷 뉴스를 읽었다. 내가 여태 살아온 날들의 두 배가 되는 시간이었다. 윤이에게 뉴스 내용을 읊어 주면서 우리가 만약 60년 뒤에도 살아 있다면 아흔 살이야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하고 난 입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길게 내밀어 하늘을 살폈다. 아주 먼 길 같으면서도 멀지 않은 길. 나이가 드는 일은 나도 모르게 했던 말을 또 하게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흔까지 살았던 할머니의 오밀조밀한 입술과, 밥은 먹었니? 같은 말을 반복하던 입 모양이 떠올랐다. 밤하늘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환기를 하기 위해 창을 열었다가 추위에 몸이 떨려 창문을 다시 바짝 닫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지나간 일들은 희미해지고 아주 잊게 되는 일들도 생겨나는데, 그게 고마울 때도 있지만 잊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일들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일 또는 사람의 이름을 꼭 꼭 잘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어떨 것 같아? 그런 상상을 해 봤는데, 그 안에는 괴로웠지만 소중한 기억이 많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순간은 크고 환한 빛이 비치던 날이 아니었다. 대부분 내가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늘이었다. 나무 아래서였다. 문 틈 사이로 비치는 좁은 빛을 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