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토지(16)

샌. 2025. 3. 12. 10:32

16권은 신경에서 생활하는 홍이 1940년 8월 1일자 신문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권의 시대 배경은 1940년대 초반으로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며 민족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때다. 길상의 손자 돌잔치 장면을 그린 대목에서 당시의 암담한 시대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 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복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하에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고기잡는 사람, 하급 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놈의 세상이 우애 될라꼬 이러노. 젊은 놈들 다 직이겄네.""

 

여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관수가 죽는다. 백정 집안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종내 벗어버리고 못하고 뒤에 숨은 채 사회 개혁에 앞장섰던 일생이 전염병으로 무너졌다. 아들인 영광과는 끝내 만나보지 못한 채였다. 관수의 죽음은 지리산 속에서 연명해 나가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종언을 맞는다.

 

악인과 선인의 대표 캐릭터는 조준구와 그의 아들 조병수다. 돈을 다 날리고 병든 몸으로 아들집에 의탁한 조준구는 죽음을 앞두고도 과오를 뉘우칠 줄 모른다.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지만 조병수는 정성으로 모신다. 천성은 어찌할 수 없음을 이 둘을 통해 본다. 지리산에 버려졌으나 해도사의 도움으로 야생의 삶을 살며 단련되어 가는 몽치도 인상적이다. 그는 자유인이며 체제 밖 인물의 상징인 것 같다. 잠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렸다.

 

<토지>의 중심인물은 누가 뭐래도 서희다. 서희는 어지러운 세파 속 한 마리 고고한 학 같은 느낌이다. 가끔씩 등장하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준다. 고독한 인간 길상의 인간적 고뇌는 그를 괴롭히면서 동시에 성장을 돕는 방편이기도 하다. 길상이 속물로 떨어지지 않는 방벽이 되는 것이다. 도솔암 관음탱화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근원,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16권의 끝은 소지감이 환국에게 하는 이 말로 마무리된다. 

"사로잡히지 말아야지. 예술가도 어떤 면에서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자유는 쓸쓸하고 고독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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