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 선생의 5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사 제목에 나온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1935년생이니 지금은 9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선생은 건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 쓰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계시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고달프고 행복은 신기루다. 쉽게 사는 사람은 없다. 겉모습은 화려할지라도 속내는 누구나 쓰라리다. 다만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아갈 뿐이다. 원한이나 분노, 불안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작은 재미로 덮어둔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슬픔을 잊고 가능한 한 재미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조다. 평생을 인간의 아픔과 마주한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기사에 나온 선생의 말씀 중 일부를 옮긴다.
"나이 든다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마냥 슬프지도 않아요. 즐겁지 않은 게 나이 드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대개 노인이 되면 성장기에 학습한 교양과 습관이 세포 조각 떨어져 나가듯 휘발돼요. 오롯이 남는 건 부모에게 받은 DNA와 기질,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뿐이죠.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그렇게 중간 교양이 사라져버리면 뭐가 남겠어요? 고리타분한 어린아이죠. 그 모습을 피하려면 노인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젊은이에게 얘기 듣는 걸 즐겨야 합니다. 하지만 경청은 무한한 자제력이 필요해요. 시간은 짧게 느껴지지, 머릿속엔 이 얘기 저 얘기 떠오르지, 그 두서없는 얘기를 듣느라 젊은이들도 인내력 테스트를 받는 거예요."
"제가 풀꽃세상이라고 환경단체에서 주는 댓글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이제 눈이 나빠지니 그렇게 좋아하던 소통도 못 하겠더라고요. 왼쪽 눈은 네팔 의료 봉사하러 다닐 때 실명했고, 오른쪽 눈도 황반변성으로 세상이 흐릿해요. 그럴 때 필요한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죠. 눈은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일을 찾자는 거죠. 손주한테 시급을 주고 내 말을 구술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시력은 잃었지만 그 일로 손주와 정기적인 대화의 물꼬를 텄어요. 이번 책도 그렇게 나왔어요."
"지방 강연 갔을 때 일이예요. 강연을 도와주신 교수님이 계단 내려갈 때 내 손을 잡아주셔서 제가 농담을 했어요. "잘 안 보이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 덕에 김 교수님 손을 만지게 돼 영광입니다." 그랬더니 손을 만지다와 잡다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만지다'는 자칫 성추행의 혐의까지 둘 수 있다는 거죠. 그 설명을 못 들었으면 어쩔 뻔 했나, 고마우면서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스스로 정신을 치료하는 사람인데, 언어에 그리 민감하지 못했던가, 반성도 했고요."
"인생의 슬픔이 작은 기쁨으로 회복되진 않아요. 잠시 잊을 뿐이죠. 인생은 고통이고 슬픔이예요. 그 끝이 죽음이라 슬픈 겁니다."
"순간순간 작은 일에 기뻐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점수를 받을 때 기쁘고, 아이들 생산해서 잘 키워낸 것도 기쁩니다. 친구와 좋은 인연을 쌓은 것도 기쁘죠. 네팔에 의료 봉사 다니는 것도, 광명 보육원에서 아이들 돌보는 것도 즐거워요. 즐거움을 목적으로 그 일을 하진 않았지만 즐거우니 자꾸 하게 되더군요."
"행과 불행은 사람이 만들어낸 신기루지요. 있지도 않은 걸 억지로 만들어냈어요. 의학적으로 행복과 가장 가까운 상태는 쾌락이에요. 소망했던 걸 이뤘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죠. 반면에 불행은 행복하지 않을 때죠. 경계는 명확하지 않아요. 간소하게 끼니만 때워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진수성찬 차려 먹어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요. 신기루와 같으니 가타부타 따질 것이 못 됩니다. 분명한 건 자기 성질대로 잘 살다 보면 만족하고, 만족이 지속되면 행복을 느낀다는 거죠."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애쓰면 마법처럼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려요. 이게 여든 다섯 해를 살아본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입니다."
"삶의 고통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서 집착하기 때문이죠. 억울하거나 불안한 생각은 인위적으로 끊어낼 수 없어요. 잊으려고 애쓸수록 과거는, 미래는, 괴물처럼 커져요.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일을 찾는 거예요. 원한을, 걱정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아서 야금야금해야죠. 상한 마음이 올라올 틈이 없도록. 불안을 끊어낼 수 없지만 희석할 순 있거든요. 그렇게 작은 재미가 오래 지속되면 콘크리트 같은 재미가 돼요."
"자기객관화만큼 어려운 게 없어요. 자기를 제대로 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높게 보거나 낮게 보거나. 대부분 자기 왜곡이죠.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노력하면 바로 보는 것에 근접할 수는 있어요."
"얼마 전 시니어타운에 들어간 친구를 찾아갔어요. 응접실에서 고운 할머니 한 분을 뵀습니다. 혼자서 책을 읽는데 책장을 안 넘기고 웃기만 해요. 일명 조용한 치매지요. 한쪽에서는 몇몇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배꼽이 빠져라 웃어요. 자, 두 그룹 중 누가 행복하겠어요?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건강해요. 친구에게 들으니 시니어타운 남자들은 대부분 혼자 밥 먹고 자기 방에 들어간대요. 서로 눈인사도 안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그걸 '강남 자존심'이라고 한대요. 다들 사회에서 한가닥 했으니 대접받으려는 자세를 못 버린 거죠. 명함 내려놓고 즐겨야 남는 거예요. 과거에 높았건 낮았건, 한집에 들어왔으니 재밌게 어울려야죠. 수다 떨면 죽을 여가도 없어요."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좀 무심한 게 좋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지요. 가끔 강연에서 만난 어머니들에게 질문해요. "자녀를 잘 키우고 싶으냐? 아니면 자녀들이 잘 컸으면 좋겠냐?" 잘 키우고 싶은 건 엄마죠. 잘 컸으면 싶은 건 주체가 아이예요. 취학 전엔 아이를 주체로 키우던 부모도 학교 보내면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하더군요. 사회 전체가 스스로 잘 크는 아이를 용납 못 하니 안타까워요. 부모는 아이가 잘 크도록 도울 뿐입니다. 다만 아이의 기질과 탤런트에 맞추기 위해 예의주시해야죠. 관찰을 잘하면 기어다닐 때도 특성이 보여요. 나머지는 아이의 자생력을 믿으세요."
"죽음은 두렵지요. 그게 정상이예요. 정신분석에서 보면 죽음을 대면하기 무서워 자살하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서요. 최근엔 관에 들어가는 체험도 하더군요. 눈 뜨고 관에 들어갔다 나오는... 하지만 그조차 오만입니다. 헛소리죠. 아무런 준비 없이 오는 게 죽음이에요. 죽음은 올 때 경건하게 받아들이면 돼요. 연습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죽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는 날까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웃음이 나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뿐이죠. 추억조차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기분 좋게 지내는 하루하루, 생활이 추억이 되는 거죠."
"아! 눈떴으니 행복하다. 이왕 눈떴으니 재밌게 살아야지. 오늘도 눈떠서 인터뷰할 생각을 하니 좋아요. 김 선생이 가고 나면 또 그 좋은 여운이 며칠을 가요. 기사가 나오면 그걸 보고 나누며 또 며칠이 즐겁겠지. 그렇게 하루하루 불안을 달래가요.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되도록 길게 만드는 거지. 오후엔 네팔에서 온 친구와 차를 마실 거예요. 그다음엔 집에 가서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켜겠지요. 눈이 안 보이니 소리로만 뉴스를 들어요. 시사 프로의 패널들이 과장해서 떠드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꼭 젊은 날 정신과에서 환자 보는 것 같아 재밌어요. 허허허. 그렇게 또 하루가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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