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은 기독교와 함께 본격화했다. 예수가 떠난 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는 영적(spiritual) 삶을, 개인의 만족, 안락, 성공을 좇은 육적(fleshly) 삶과 대비했다. 자발적 가난, 사유 재산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새로운 세상의 갈구, 인류에 대한 헌신 등은 그들이 구현한 영적 삶의 모습들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부(마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아예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부를 좇는 일을 죄악시했다기보다, 애초에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렇다. 물질적 풍요보다 영적 풍요를 중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의 체제를 외면하지 않고 산다면 부자가 될 방법이 있는가.
1500년 후 예수의 메시지는 도래할 세상(자본주의)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종교개혁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정직하게 축적한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예수의 말을 수정함으로써, 영적 삶은 육적 삶과 통합한다.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라는 온전한 마몬 세계에서 영성은 자본주의와 친화를 넘어 도구화한다. 명상이나 템플스테이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의 용도를 떠올려보면 쉽다. 영성의 출발점은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나를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계를 계속 받아들일 것인가?"
실제 영성 프로그램들은 많이 다르다. 자본주의적 삶이 만들어내는 우울과 허무, 무력감을 해소하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자본주의적 삶을 회복-지속하도록 해주는 상품이다. 고갈된 영성을 충전하는 일일까, 영성의 뿌리까지 긁어내는 일일까. 90년대 이후 경영학이나 산업 및 조직심리학 같은 자본의 학문에서 영성이 활발히 연구되는 건 '도구적 영성'이 본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과거엔 생산 효율화와 합리화를 통해 노동자를 어떻게 하면 더 짜낼 수 있는가가 숙제였다면, 이젠 마지못해 출근하여 꾸역꾸역 일하는 노동자를 활기 있고 공동체(여기에선 회사)의 이득을 제 이득처럼 여기는 '영적인 노동자'로 만드는 게 자본의 숙제다.
- 김규항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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