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영 선생의 숲에 관한 철학 산문집이다. 숲을 산책하며 느끼고 사유한 사색의 단상들이 묵직한 무게로 담겨 있다.
숲은 '수풀'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수풀은 '수(樹)'와 '풀'의 합성어다. 숲은 나무와 풀만 아니라 온갖 생물이 살아가는 다(多)세계의 총합이다. 또한 숲은 여러 삶의 주체들이 각자의 삶을 공생의 문법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집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 태초의 고향인지 모른다. 우리는 숲을 거닐며 마음의 고요를 회복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 <숲의 즐거움>은 숲 산책의 행복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몇 새로운 단어를 발견해서 기뻤다. 그중 하나가 '유산(遊山)'이다. 옛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산의 숲길을 거니는 일을 유산이라고 불렀다. 거니는 전통이 소멸되면서 지금은 유산 대신 등산이 산행의 전부가 되었다. 지은이는 등산이 아니라 유산을 하러 산에 간다고 말한다.
유산을 하는 이는 등산과는 전혀 다른 색감의 소망을 품고 산에 든다. 산을 소요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천연한 자연을 닮은 것이다. 우주가 바라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일치하며, 청화한 우주와 청화한 자기 마음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는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숲 속에서 인간은 무위를 경험하고 심신에는 적막이 찾아온다. 숲길을 소요하며 우리는 걸으면서 머물게 된다.
또 하나는 '소연(蕭然)'이다. 사전에는 '소연하다'가 '호젓하고 쓸쓸하다'로 나와 있다. 지은이는 '자못 적적하며 은근히 쓸쓸한 분위기가 나는데, 그 분위기가 가뿐하고 가든하다'고 더 자세히 설명한다. 홀로 숲을 산책할 때 우리는 고독 속에서 만물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온전함과 평화를 느낀다. 바로 소연한 시간의 체험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젊은 시절에 봤던 루소의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이 떠올랐다. 그때 뇌리에 강하게 박힌 '고독한 산보자'는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삶의 표상이 되고 있다. 책에 실린 우석영 선생의 글 하나를 옮긴다.
고독한 산책의 행복
잠시 사회와 집단을 떠나 사회와 집단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홀로 있되 행복감을 유지하려면, 홀로 있음은 반드시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아니어야 한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아닌 고독.
현재의 한국어 철학에서 이것을 개념화한 말은 없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소연(蕭然)함'이다. 소연함이란 자못 적적하며 은근히 쓸쓸한 분위기가 나는데, 그 분위기가 가뿐하고 가든함이다.
소연함은 '정상(頂上)'의 자리다. 혼자 있음 그 자체의 지복, 그것이 바로 소연함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한편으로는 진사회적 또는 친사회적 동물로서 강한 집단 정체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동물이기도 해서 강한 개별자(개인)의 성격을 지닌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성질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직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로 되어 숲을 산책할 때,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사회성의 압박으로 인해 온전치 않았던 나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강렬히 느끼는 걸까? 무리를 벗어나 드디어 이제 나는 하나의 온전한 개체이고 주체인 걸까?
답은 '아니다'이다. 숲길에서 문득 소연함에 젖어들 때 나는 내가 개체라는 사실에 감격하지도, 주체라는 사실에 경탄하지도 않는다. 내가 느끼는 건 오히려 개체성과 주체성이라는 개념의 불완전함, 섣부름, 무용함, 무의미함이다. 소연함이 주는 행복의 자리는 개체성과 주체성의 퇴각하는 자리다.
소연함은 신기한 감정이다. 소연함은 오직 나 홀로 있음으로만 가능한데, 홀로 있어보니 어째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소연함을 느끼며 나는 나의 온전함을 느끼지만, 그 온전함은 내 개체성과 주체성의 온전함이 아니다. 정반대로 내 개체성과 주체성이 알고 보니 흐릿한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느끼는 온전함이다. 나는 온전한데, 내가 비어 있거나 열려 있기 때문에 온전한다.
이러한 특이한 상태에 놓이는 이는 엄밀히 말해 결코 혼자가 아니다. 산책자는 주위의 것들과 함께 있다. 친교와 상생이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견결한 문법임을 간파한 자는 (동료 없이) 홀로 있어도 (지구 안에서는) 혼자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의 혁명[頓悟]은 산책자의 영혼을 개방한다. 산책자는 어떤 충만감 속에서 침묵을(말과 영혼의 나지막함을) 고집하지만 또한 완연 외계에 개방되어 있어서 말을 건네고 싶을 때는 언제든 누구에게라도 말을 건네는 상태를 체험한다. 마음이 그만큼이나 천진스럽고 천연스러워졌기에 이것을 소연함이라 한다.
더 많은 쾌락으로 보상받고, 더 따뜻한 만남과 소통으로 심신을 회복하려는 행복과 치유의 기획이 더 흔하고 인기있지만, 이런 기획을 실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는 쾌락의 부산물인 피로이고, 또 하나는 만남과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쾌감이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효율성 높은 기획은 소연한 시간을 체험하려는 기획이다. 숲 산책은 이런 시간 체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의 마을이라는 공동체에 속한 채 "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로써만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의 한 얼굴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행복은 인간의 마을(공동체)에서 잠시 퇴각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삶의 피정(避靜, retreat) 속에서 인간의 마을보다 더 크고, 인간의 마을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토대'인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에 귀속되는 가운데 소박한 존재가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숲 산책으로 나타난 이 무인칭의 존재가 마을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 마을에서 일하는 시간, 이것이 행복한 사람의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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