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고뇌 속 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말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 책은 대통령을 옆에서 모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쓴 노 대통령에 대한 회고 기록이다.
<오래된 생각>은 기득권 세력만 아니라 여권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고독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육백 년 기회주의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모난 돌이 정 맞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연속이었다. 세상은 갑자기 등장한 비주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대통령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흔들었다.
특히 임기 말년에는 부동산 폭등, 북 핵실험, 헌법재판소장 지명, 작전통제권 환수, 한미 FTA, 검찰 항명, 여당과의 갈등 등 무수한 난제에 시달렸다. 책에는 대통령이 사임할 결심까지 하는 대목도 나온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가 빈말은 아니었다. 너무 직설적인 대통령의 화법이 족벌신문과 야당으로부터는 엄청난 공격거리의 호재가 되었다.
노 대통령은 검찰을 정치에서 독립시키려 나름 노력했고,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분리를 하려 했으나 내내 검찰과 갈등을 빚으며 성공하지 못했다. "이건 검찰을 독립시킨 게 아니라 무소불위의 호랑이로 키운 거야." 건드릴수록 점점 세력이 커진 검찰은 문재인 정부 끄트머리에 와서야 민주당에 의해서 소위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되었다. 전임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사뭇 흥미진진하다.
모든 정치 싸움은 기득권 다툼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이 말하는 바도 비슷하다. 비주류는 주류에 도전하면서 기득권 해체를 외친다. 주류는 자기들이 공들여 쌓은 성을 그냥 내어줄 리 없다. 민주당과 검찰과의 대결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나 검찰이 국민을 들먹이는 것은 가소로운 위선일 뿐이다. 이제 속아넘어갈 국민은 거의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그 발걸음은 너무 지그재그로 뒤뚱거린다.
책에서 저자는 본인의 학창 시절 이야기도 상당 부분 들려준다. 익훈, 인수, 희연 세 소꿉동무가 각자 다른 길로 나간 과정이 흥미롭다. 이미 계급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세 명의 진로는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 며칠 뒤면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내가 지지한 후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수결로 당선되었으니 반대편의 우려를 씻어주는 멋진 정치를 보여주길 바란다. 이념으로 갈라진 나라를 어떻게 통합해서 이끄느냐가 그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중 노무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면의 존경인지는 모르지만 노 대통령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 잘 숙고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