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날마다 만우절

샌. 2022. 4. 7. 07:45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날마다 만우절'을 비롯해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날마다 만우절'은 소설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된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아쉽게 생각될 정도로 소설은 흡인력이 강하면서 잔잔한 울림을 준다. 주인공은 주로 여성들인데 이들이 펼치는 인간사가 애잔하고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걸 담아내는 소설가의 담백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속도 빠른 짧은 장면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나는 11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 밤'이 제일 인상 깊었다. 한밤중에 킥보드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쓰러진 여성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칠순을 앞둔 주인공은 남편이나 딸로부터 소외되어 겉돈다. 그녀를 구해준 것은 남편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청년이었다. "자네도 땡. 그러니 이제 집에 가요." 구원의 손길은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음을 주인공도 잘 알 것이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어조로 보통 여성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인간 관계의 갈등, 예기치 않은 죽음 등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인간을 덮친다. 겉으로 보이는 인간은 짓밟히는 풀처럼 나약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절망 속에서 빛을 찾아 나아간다. 작가의 글은 생명의 의지에 대한 결연한 믿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낱낱의 생명의 처연하고 슬프다.

 

'날마다 만우절'은 시큼하지만 유머가 있어 좋았다. '날마다 만우절'을 차용하여 나도 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어. 기차는 만원이었고 앉을 자리는 없었어. 대여섯 시간은 서서 가게 생겼지. 응당 그랬으니까 불편한 것도 몰랐어.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무료하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 마침 사과장수가 지나가길래 사과를 사서 그 여학생에게 주라고 부탁했어. 어떻게 되나 곁눈질을 하며 봤지. 사과장수가 나를 가리키는 걸 보니 누가 줬느냐고 물었던가 봐. 갑자기 옆에 앉았던 건장한 청년이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오는 거야. 나는 겁이 덜컥 났어. 여학생 혼자인 줄 알았지 동행이 있는 줄은 몰랐던 거야. 청년은 손가락을 까딱하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거야. 이젠 죽었구나 싶었지. 열차 끝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묻는 거야. 넌 누구고 왜 사과를 주는 거냐고. 나는 더듬거리며 변명했지. 내 모습이 너무 순진해 보였는지 청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날 기차 밖으로 던져버리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했지. 그런데 웬걸, 여학생 주소를 적어 주는 거야.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는 만나지 말고 다음 방학 때에 찾아오라고. 청년은 여학생의 오빠였어. 마지막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군. 여학생 얼굴은 다시 쳐다볼 수 없었어. 여섯 달 뒤 겨울 방학 때 그 주소로 찾아갔지. 그 뒤의 이야기는 아껴 둘래. 오늘 농담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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