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대학생이었을 때 필독서였다. 그때 번역서가 나왔는지, 아니면 원서로 도전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완전히 읽어내지는 못했다. 읽어야 한다는 책이지만 읽지는 못하고 뒤로 남겨진 책이었다.
토머스 쿤(T.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워낙 자주 인용되는 책이라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읽지 않고도 무얼 말하는지 한 마디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유명해진 단어가 '패러다임(paradigm)'이다. 과학의 한 분야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뛰어난 성취를 통해 정상과학에 진입한다. 일단 정상과학이 되면 이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명료화하는 방향으로 과학은 발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변칙현상이 일어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과학자 공동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두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하며 정상과학에 균열을 가져온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채택되면 과학자들은 기존의 현상을 새로운 언어로 기술하고 새로운 결과를 내놓는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종교적 개종과 비슷하다고 쿤은 주장한다.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닌 단지 다른 것으로의 변화일 뿐이다. 과학 발전은 단선적인 진보가 아니며,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다. 진화가 생물체가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이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을 자연에 대한 진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역자의 해설을 중심으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사실 이 책이 말하는 내용 자체는 이해하는 데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책을 읽기는 힘들다. 이번에도 온전히 다 읽어보지 못하고 대충 훓어봤다고 해야겠다. 핑계를 대자면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김명자 선생의 번역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개정판이 나와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이 유명한 책이 대중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제일 큰 원인이 아닐까.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이 나아가는 모델을 제시한 책이다. 이과생이라면 과학을 바라보는 기본 얼개를 이 책을 통해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눈에 드러나는 과학의 열매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과학 사상의 기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선이다. 나라의 과학 토양에 거름을 주고 뿌리를 튼실히 하는 일이다. 우리는 스포츠의 기초인 육상이 허약하듯 과학 분야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을 보면서 더욱 아쉽게 느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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