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술과 바닐라

샌. 2022. 3. 18. 10:20

작년에 나온 정한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술과 바닐라'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는데 이런 젊은 여성 작가의 글에서는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좋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인생의 스산한 면을 드러내어 쓸쓸하다. 특히 일과 육아의 무게에 짓눌린 결혼한 여자의 삶을 사실 그대로 잘 그려낸다.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거실에 걸린 화사한 가족사진은 빙산의 드러난 부분일 뿐, 수면 밑의 차가운 진짜 세계를 작가는 가차 없이 재현해 낸다.

 

일곱 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기진의 마음'이었다. 기진은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둔 유방암 투병을 하는 주부다. 이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암 환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 소설이다. 남편이나 자식, 친구나 그 누구도 기진의 고독과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다. 이런 심리적 고독이야말로 아픈 사람이 견뎌내야 할 제일 큰 고통이 아닐까, 라고 상상해 볼 뿐이다. 공감하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진실로 마음에 다가가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이웃에 살았던 한 분을 떠올렸다. 그분 역시 유방암 투병을 하다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4년 만에 돌아가셨다. 의사 아들이 있었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기도 했다. 걷기를 하러 학교 운동장에 나가면 가끔 마주치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는데 뒷모습이 너무 쓸쓸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실존적 고독과 직면해야 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인간은 무언가를 바라고, 염원하고, 기도한다. 이런 마음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참새 잡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하지만 조금 늦어도 괜찮다. 흑암처럼 검은 바다라고 해도 그곳에는 여전히 솟구치고 부서지는 파도가 있으리라. 아이와 나란히 서서 파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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