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 씨가 쓴 여행 수상집이다.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이 대선에 패배했던 직후인 2013년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일한 탁현민 씨는 패배의 충격으로 파리에서 석 달간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한다. 이때의 감상을 글로 적어서 책으로 냈다.
탁현민 씨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된 후 이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공연 연출가로 중요한 대통령 행사를 지휘했다. 대표적인 게 남북 정상이 만난 판문점 회동이다. 고식적인 형식을 탈피한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금방 남북 화해가 이루어질 듯 가슴을 뛰게 했으나 지나고 보니 결과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당시 야권에서 보여주기식 쇼는 그만두라고 했는데 일부 맞는 말이기도 했다.
<흔들리며 흔들거리며>에는 선거 결과에 상심한 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나도 그때 허탈한 기분을 달래려고 동료 둘과 무등산으로 겨울 등산을 했었다. 하물며 선거 당사자야 오죽했겠는가. 제목에 쓰인 '흔들린다'는 말은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따왔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윈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좌절과 절망, 의심과 회의가 나침을 떨게 한다. 덕분에 나침은 고정되지 않으며 여전히 정확한 방향을 일러준다. "그러니 이제 흔들릴 때 흔들리겠다"고 탁현민 씨는 마지막 문장을 마감한다.
글은 진솔하게 작가의 마음을 드러내면서 굉장히 재미있다. 슬픔 가운데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알고 보니 탁현민 씨는 젊었을 때 신춘문예에 응모한 문학도였다. 연출만 아니라 글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대단하다.
책의 글 중에 '불안한 여행'이라는 부분을 옮긴다.
... 우리는 대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방을 꾸리지만, 가방 안에는 가장 편안하게 일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들을 챙기곤 한다. 피부에 익숙한 로션에서부터 오랫동안 써오던 면도기와 면도크림까지. 또 헤어드라이어와 편안한 옷가지들, 심지어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과 손에 익은 펜, 노트까지 알뜰하게 챙긴다. 여정 내내 불확실성과 만날 것을 염려하며 일정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낯선 곳에 스스로를 던진다지만 사실상 미리 준비한 계획 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한다.
그런데 어느 곳을 갈지, 가서 무엇을 볼지 무엇을 먹을지까지 계획하는 것을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떤 여행이냐는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고전적인 해석에 동의한다면 그 여정은 철저히 비일상적이며, 불확실하며, 낯선 곳에서 더 낯선 곳으로의 이동이며, 미지와 기대로 가득 찬 무엇이어야 하지 않을까? 굳이 책에서, 인터넷에서 얻어낸 정보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찾아낸 뒤 기뻐하는 것은 나로선 잘 이해하기 어려운 기쁨이다.
그래서 철저한 계획의 여행이 지루한 이유는 계획이 너무 철저하다는 데 있다. 너무도 철저해서 뭔가 새로운 사건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전개는 뻔하고, 위기는 사라지고, 절정은 시큼털털한 소설 같다고 할까? 빈틈없는 일정들은 다양한 다양한 전개를 막고, 충분히 대비한 상황이 위기를 막고, 그런 것들이 절정을 원천봉쇄하니 애초부터 이런 여행이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여행이 좀 비일상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면, 뭔가 미지에 대한 기대의 시간들로 채워지길 바란다면 좀 덜 꼼꼼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있는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좋으면 며칠 더 머무를 수도 있고, 싫으면 다음날 바로 떠날 수도 있어야 한다. 잘못 시킨 음식을 맛있는 척 먹을 줄도 알아야 하며, 주문을 잘못하여 디저트를 두 개씩 먹게 되어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즈가 안 맞는 옷을 사도 살을 빼거나 살이 찌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줄도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산 물건과 똑같은 물건을 더 싸게 파는 가게에 가서 당황하지 말 것이며, 한 번 지나갔던 길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그 길과 내가 어떤 인연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보내지도 않을 편지지를 습관적으로 사 모을 줄 알아야 하고,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두려움에 떨며 밤길을 걸어보는 경험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무서운 데 안 무서운 척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빨리 할 줄 아는 것도 좋다. 집 안에 열쇠를 놓고 문이 잠기는 것도 한 번쯤은 경험해볼 만한 일이다. 진짜 멘붕이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집 밖은 집 안과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걸 알고 뭔가 달라지길 기대하며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여행을 나서면서 계획은 버리자. 굳이 계획해야겠거든 가슴 조이는 불확실한 시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을 계획하길. 익숙한 것들과 만나는 것은 집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자, 여행을 떠나자. 불안하고 불온한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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