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7696

길 / 정희성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

시읽는기쁨 2003.09.15

도연명의 귀거래사

도연명(陶淵明)..... 도연명의 시를 처음만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한문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저 멋있다고만 느낀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는 구절과, 대표작이 `歸去來辭`인 전원시인이라는 정도로 소개받은 기억이 난다. 그 후 한참 지나서그분의삶과 시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단순히 전원시인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그분의 깊은 내면세계에이끌리게 되었다. 나이 41세(405년).... 팽택현령(彭澤縣令)을 사직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소통(蕭統)의 `陶淵明傳`에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해가 끝날 무렵 마침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가 현(縣)에 도착하니 아전이 청하길, "꼭 허리띠를 하시고 뵙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연명은 탄식하며 "내가 어찌 다섯 말의 미곡 때문..

참살이의꿈 2003.09.1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오랫동안 `마가리`를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막살이를 뜻하는 북쪽 방언이..

시읽는기쁨 200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