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샌. 2025. 4. 24. 09:13

아파트 현관 앞에 라일락이 활짝 폈다. 드나들 때마다 강렬한 꽃향기에 취한다. 아줌마 한 분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라일락에 휴대폰을 갖다댄다. "오빠, 라일락 향기가 기가 막혀. 냄새를 맡아봐." 이 정도 바람이라면 폰으로 냄새를 전송하는 기술이 개발될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라일락, 하면 고등학생이던 시절이 떠오른다. 국어 시간에 처음 배운 시가 김용호 시인의 '오월의 유혹'이었다.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塔)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쳐오르는 가슴을

네게 맡기고, 사양(斜陽)에 서면

풍겨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히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여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이미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이 시를 읊던 국어선생님의 자세며 말투까지 떠오른다. '탑은 왜 높아만 가고'라고 표현했는지 오래 설명하셨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라는 구절도 잊히지 않는다. 라일락 향기를 '아기자기하다'로 그린 점이 재미있었다. '아기자기하다'라는 것은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향기가 유발하는 여러 상념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라일락을 보지 못했다. 향기가 어떤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상상만 하던 식물이었다. 

 

 

'라일락'이라는 허수경 시인의 작품도 있다.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라일락의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라던가. 라일락 향기는 우리를 아득하면서 그리운 과거로 되돌려준다. 아마도 그 시절의 풋풋했던 사랑을 떠올릴지 모른다. 철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정한 것이었는지도.

 

 

'라일락'이라고 발음할 때 입안을 돌돌 구르는 어감도 좋다. 시인의 말을 흉내 내서 널 보며 활짝 웃는다.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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