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내가 예수에 미친(?) 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20대 때, 또 한 번은 50대 때였다. 50대 때는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고 서울 아파트를 처분해서 밤골 빈 터에 집을 짓고 세상과 격리되고자 했다. 그 여파로 예기치 못한 격랑에 휩쓸리면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 사건의 결과물이다.
20대 때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돌연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일이었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때였다. 캠퍼스에서도 뜨거운 성령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신앙 분위기가 지배했다. 물리 전공인 우리 과 30명 중에서도 목사가 3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나는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쯤에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4학년 때는 신학대학원 입학 준비에 열중했다. 얼마간 자신이 있어서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지원했고 필기시험과 면접까지 거쳐서 합격했다. 언젠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인왕산과 안산 트레킹을 하다가 연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30여 년 전 그때 시험을 봤던 붉은색 2층 벽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면접을 보던 교수는 물리를 전공한 놈이 신학대학원에 왔으니 황당하게 느꼈을 법하다. 왜 신학을 공부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며칠 지나고 나서 등록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나는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 교회는 극보수 우익의 복음주의 교회였다. 카리스마 강한 담임목사는 성령 충만과 예수 전도를 강조했다. 덕분에 교회의 신도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런 들뜬 분위기가 적응하기 어려웠고 내적 갈등은 잠복한 상태로 숨어 있었다. 내가 읽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어긋났다. 예수는 누구며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교리의 껍데기를 벗기고 진실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 예수를 제대로 알고 싶은 내 선택이 신학대학원이었다. 세계의 지성들이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탐구한 내용을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에 갈 미래의 계획까지 짜 놓았다. 성경에 나오는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생생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건방지게도 '내가 만난 예수'라는 내가 쓸 책의 제목까지 정해 두었다. 혼자 신학대학원 준비를 하며 상당 기간 이런 천진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오래 준비하고 합격했지만 포기는 쉬웠다. 막상 등록을 하려니 공부냐 직장이냐의 선택이 간단하지 않았고, 집안 상황을 외면하고 내 갈 길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당장의 등록금은 어찌 해결하더라도 그 뒤는 난감했다. 더구나 한두 해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부모님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되겠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겠지"라는 순진한 믿음은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교원자격증을 포기하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분필을 들고 힘 없이 칠판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니 그 시점이 내 인생의 한 터닝 포인트였다. 만약 교직 대신 신학 공부의 길로 갔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학계에서 내 뜻을 펼쳤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논리의 치밀성이 부족한 내가 학문적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현실에 무릎 꿇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것이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내가 선택한 것은 사람이 적게 간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가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었다. 인생을 돌아볼 때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부냐 직장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그때다. 호구지책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이 있던 그 붉은 벽돌 건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사진은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던 그때 즈음에 다니던 교회 사무실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 왼쪽의 친구는 자신의 꿈대로 좋은 목회자가 되었을까. 아주 먼 47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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