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30)

샌. 2022. 3. 6. 12:03

 

3월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때다. 학생이나 선생 모두 새로운 만남 앞에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본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중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가 나에게는 3월이었다.

 

아이들은 봄 방학을 마치고 3월에 개학을 하면 새 반이 편성되고 담임을 배정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담임이 될지 제일 관심사일 것이다. 지금 손주를 봐도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걸 본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3월 첫날 전체 조회가 열린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이 담임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40여 년 전인 1979년 - 아니면 1980년일지도 - Y여중에 근무할 때 운동장에 전체 학생이 모인 가운데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담임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반별 소개를 할 때마다 아이들한테서는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죽점퍼를 입고 교장선생님 옆자리에 서 있다. 학교 현장에 나온 지 5년차가 되었을 때다.

 

1979년은 박정희 통치의 유신 말기면서 격동의 시기였다. 후반기로 갈수록 시국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박정희 시해라는 10/26이 일어났다. 한 인간의 지나친 권력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말이었다. 박정희는 북한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활용해서 자신의 장기 집권을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우리 세대는 반쪽짜리 대학 생활을 보내야 했다.

 

군사정권이 철권을 휘두른 당시 사회는 병영 분위기와 다름없었다. 박정희나 체제를 비난만 해도 붙잡혀 갔다. 통금이 있었고 매일 오후 6시의 하기식에는 온 국민이 얼음이 되었다. 길거리의 행인과 차량은 올 스톱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들으며 애국심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교사들 대부분은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다들 고분고분해 보였어도 언젠가는 이런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언젠가는'이 벼락처럼 한순간에 찾아온 것이 1979년의 10/26이었다. 다음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조회를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싸했다. 몇몇 아이는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예상과 다른 아이들의 반응에 적이 놀랐다. 이 아이들은 출생해서부터 박정희 밑에서 성장하고 국가주의의 세뇌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슬픔 앞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전달사항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나왔다.

 

군사독재여서 세상살이가 빡빡했을 것 같지만 그때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일반인이 살아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체제가 어떠하든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울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사다. 인간의 삶이란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운동장 조회대에 함께 선 그때의 동료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각자 개성이 있으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신 분들이었음을 떠올린다.

 

한창 산업화가 한창인 때라 어디서나 고급 인력이 필요했고, 선생을 하다가도 기업으로 스카우트되어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능력이 없어서 교직에 남아 있다고 술자리에서는 자조 섞인 소리가 나왔다. 영어 선생이었던 가까이 지내던 후배도 사표를 내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원 월급이 선생의 두 배가 넘었다. 떠나던 마지막 자리에서 후배는 자신한테는 선생이 적성에 맞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숨을 쉬던 기억이 난다. 또한 존경하던 선배 한 분은 선생도 싫고 한국도 싫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렇듯 교직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일부 선생들은 음성적으로 과외를 하면서 부족한 월급을 보충했다. 당시에도 선생이 학생에게 과외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영어나 수학 교사는 과외 자리가 많았다. 나에게도 팀에 합류하라는 제안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저 때는 결혼하기 전이라 씀씀이가 적어 돈의 궁핍을 몰랐다. 그보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당시는 교직원 회의가 아침과 저녁에 하루 두 번씩 있었다. 뻔한 지시사항이 무한 반복하는 별 의미 없는 회의였다. 교장선생님이 교직은 '성직(聖職)'이라면서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 잦았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틀렸고, 괜스레 삐딱한 행동을 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Y여중에 있는 동안 3학년 담임을 한 번도 맡지 못했다. 관리자의 신임을 받지 못했으니 쪽팔리는 노릇이기는 했다.

 

사진에서 입고 있는 검은색 가죽점퍼는 내 애용복이었다. 면목동 단독주택에 살 때 현관에 인접한 방 한 칸을 세놓고 있었다. 셋집에는 중년의 부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살고 있었다. 그 집과는 10년 넘게 함께 살았으니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그 집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선생은 옷을 잘 입어야 한다면서 억지로 나를 끌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산 것이 바로 이 가죽점퍼였다. 점퍼가 나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입어보니 괜찮았고, 색이 바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입고 다녔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그 집 딸이 무척 똑똑했다. 어린 나이에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바른 소리를 잘 해서 우리는 똑순이라고 불렀다. 너무 똑똑해서 아주머니가 감당을 못할 때도 있었다. "커서 뭐가 될라고"라며 혀를 차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반짝거리며 초롱초롱한 눈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 딸이 결혼할 때까지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소식이 끊어졌다. 그런 영민함이었다면 사회생활에서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였을 것 같은데, 그때의 똑순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쯤은 아마 오십 줄에 들어섰을 테다.

 

파일에서 옛날 사진을 넘겨보면서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본다. 커피 한 잔이 옆에 있으면 금상첨화다. 두꺼운 앨범의 사진은 없애버린지 한참 되었는데 다행히 스캔해 둔 파일이 남아 있다. 아쉬운 건 20년 전의 스캐너라 화질이 시원찮다. 흐릿하게 보이니 어찌 보면 옛 정취의 분위기를 살리는 효과가 있는 것도 같다. 함께 지냈던 분들, 짙었든 옅었든 모두 고마운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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