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26일 동안의 광복

샌. 2021. 1. 9. 12:10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이 조선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9월 9일까지 26일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부제가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한겨레신문의 길윤형 기자가 썼다.

 

1부는 8월 15일 광복 당일의 숨 가빴던 시간을 세 세력(여운형, 총독부, 송진우)의 입장에서 복원한다. 혼란한 때에 발빠르게 나선 쪽은 여운형이었다. 총독부는 치안 유지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명망 있는 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방침에 협조하면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의 중심인물은 여운형이었다. 그가 만든 건준은 안재홍 주도로 끝까지 좌우합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익을 대표하는 송진우는 좌익에 이용당할 것을 두려워해 동참을 거부한다. 사실 여운형은 좌익에 가깝기는 하지만 실용적인 중도 성향의 인물로 보인다. 그는 좌익과 우익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다. 좌익에서는 우익이라고 하고, 우익에서는 빨갱이에다 친일로까지 매도했다. 나중에 건준이 박헌영이 주도하는 골수 좌익에 넘어간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좌우합작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결국 남북의 분단을 방조하게 된 것이다.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국내 정치 세력은 좌와 우로 완전히 찢어진다. 서로 힘을 합쳐도 아쉬울 판에 박헌영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과 우익의 한민당은 소련과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생결단으로 싸운다.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먹잇감을 자체한 꼴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역사의 귀결인 것 같다. 아무 준비도 없이 외세에 의해 갑자기 닥친 광복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래도 분단을 막을 기회가 없었을까? 지은이는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의 정국을 안타깝게 조망한다. '5년간 신탁통치'의 부당성에만 집착했지, 합의문에 적힌 조선인으로 구성된 '통일된 임시정부' 구성은 소홀히 했다. 극한적인 좌우대립 상태에서 친탁은 매국노이고 반탁은 즉시 독립을 위한 애국운동이었다. 그러나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할 때 반탁만을 내세우며 무조건 반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분단 상태가 이렇게 오래 지속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은 하루뿐이었다. 조선인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지만 거의 성사 불가능한 일이었다. 외세의 압도적 규정력은 해방 이후 7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 비극의 원천이다. 지금 진보와 보수라 칭하는 세력의 근저에는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더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이나 당쟁과도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 뿌리는 너무 깊고 질겨서 지금도 우리의 숨통을 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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