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샌. 2022. 10. 7. 10:32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아니 내 심보를 바꾸어야겠다.

 

내 성격의 단점은 느긋하지 못한 점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특히 기다리기를 못 한다. 잠시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쉽게 화를 낸다. 아내는 나와 식당에 가면 음식이 늦게 나올까 봐 두려워한다. 종업원을 불러 꼭 한 마디씩 하기 때문이다. 유명 식당 앞에서 줄서기는 아예 하지 못한다. 차라리 이름 없는 집에서 먹고 만다. 집안 식구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 이런 기다리는 일과 관계가 있다. 불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무 데서나 높은 톤의 말을 내뱉는다. 아내가 질색을 할 수밖에 없고, 손주라고 못 느꼈을 리가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치 얘기가 나오면 같은 상황이 생긴다. 어제는 당구 모임 뒤 여섯 명이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한 사람이 지난 주말 광화문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 갔다 온 얘기를 하니 다른 하나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전개되는 얘기는 뻔했다. 좌파를 척결하지 못해 큰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 의견이 같았다. 최근에 윤석열의 낮은 지지율도 여론조사 기관의 조작이란다. 길거리 조사에서는 윤석열 지지가 90%였다고, 이게 민심이라고 한다. 제일 하이라이트는 윤석열이 정조와 닮았다는 것이었다. 듣기가 거북해서 "정치 얘기 그만 하자!"라고 버럭 화를 냈다. 사실 혼자서 다섯 명을 감당하기에는 내 힘에 벅차서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어울리지만 정말 못 말리는 노인들이다.

 

일반적으로 화의 근원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일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 때 화를 낸다. 거기에 조급한 성격이 부채질한다. 내 경우는 후자의 탓이 크다. 타고난 게 밴댕이 속이니 냄비처럼 쉽게 끓어 넘친다. 가족들에게 쉽게 화를 내는 데서 알 수 있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사실은 저한테 화를 내는 것이 가족에게 전이한 것이다.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손주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문득 김수영 시인이 떠올랐다.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이렇게 자조했다. 아, 늘상 이런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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