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금주 100일

샌. 2022. 11. 14. 11:06

금주 100일이 되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그 참담했던 감정이 100일을 버틴 힘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술을 끊은 뒤 생활에 큰 변화는 없다. 금단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알코올에 의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다만 정신적으로 짜증과 우울이 늘었다. 전에는 술 몇 잔으로 기분을 업 시킬 수 있었으나 이젠 견뎌내야 한다. 금주는 확실히 정신 건강 측면에서는 마이너스다.

 

밖에 나가서 지인을 만나 술을 하고 돌아오는 밤은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맨정신일 때는 투덜대고 원망하던 것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도 넓어졌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술에 취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여기 있지만 아주 잠시 동안은 세상이 당신의 멱살을 잡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적당한 음주일 때다. 조금 과하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치솟아 올라와 사정이 달라진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숙취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술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적당한 술은 보약이지만 지나치면 온갖 화(禍)의 근원이 된다. 술로 패가망신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술자리에 동석해서 멀뚱히 앉아 있으면 말한다. 적당하게 마시면 되는데 뭘 야박하게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문제는 적당히가 안 된다는 데 있다. 만취한 젊은이는 그나마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허나 술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역한 냄새를 풍기는 노인네는 꼴불견이다. 어쩌다이긴 하지만 이젠 그것조차도 경계하는 것이다.

 

모임에는 식사 겸해서 술이 빠질 수 없다. 다들 나이를 먹다 보니 주량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각 소주 한두 병은 기본이다. 다들 젊잖아서 추태를 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전에 한 말을 무한 반복하니 맨정신으로 옆에 있기가 고역인 때도 있다. 전에는 나도 저랬을 텐데 못 참아주면 도리가 아닐 터이다. 알코올이 주는 몽롱한 기분 좋은 취기를 잃었지만 대신 사람들이 취해가면서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술을 끊으니 속은 확실히 편해졌다. 술 마신 뒤에 겪는 속 부글거림이 없어지고 아침에 가래떡을 만드는 빈도가 늘어났다. 내 위장은 아마도 고마워할 것이다. 대신에 삶은 약간 무채색으로 변했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낮술의 재미를 걷어차 버린 셈이다. 고기반찬이 있다고 한 잔, 비가 온다고 한 잔, 기분 좋다고 한 잔, 우울하다고 한 잔 하며 어지간히 창고로 들락거렸다. 이제 창고에는 버림받은 소주병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선택이란 하나를 얻지만 다른 하나는 잃는 게임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에게도 무수한 선택이 있었다. 나타난 결과를 보고 후회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모든 선택은 그 당시의 조건에서는 최선이었음을 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대부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이라 보이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나는 이미 정해진 길을 그저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주 100일이 되었지만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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