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좌파와 우파

샌. 2022. 9. 5. 10:41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포함되어 있지만 좌파라고 하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색깔이 진하게 느껴진다. 빨갱이 정당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일 게다.

 

나는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물을 때가 가끔 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동기들의 글에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것을 보면 좌파가 맞다. 그러나 살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우파와 다를 게 없다. 머리로는 좌파이고, 삶으로는 우파다.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묻는 것은 군자인가, 소인인가라는 질문과 유사한 것 같다. 우리들 대부분은 양쪽을 왔다갔다 한다. 지금은 좌파였다가 조금 뒤면 우파가 될지 모른다. 지금은 군자처럼 넓은 마음의 품이지만, 이내 속 좁은 소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좌파든 우파든, 군자든 소인이든, 그 모두가 삶의 일부다. 좌파는 옳고 우파는 그른 것이 아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진영의 논리에 매몰되면 일부러 한 쪽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좌와 우, 양쪽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중심 견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인생살이의 어려운 점이 아닐까 싶다.

 

좌파와 우파에 대한 장석주 시인의 글 한 편을 만났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라 여기에 옮긴다.

 

 

당신의 자리는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 장석주

 

'좌파'의 스펙트럼은 넓다. 좌파의 몸에 새겨진 바코드를 읽으려면 우선 그 이력과 전력의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골수 종북좌파에서 강남좌파까지, 진보좌파에서 대안좌파까지, 우울한 좌파에서 감상적인 좌파까지, 급진적인 노동운동가 전력의 좌파에서 뉴에이지 방랑자 전력의 좌파까지, 에코페미스트에서 근본주의 생태주의자까지. 이들 '좌파'가 늘 옳은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한다. 그러나 폐쇄적인 자민족중심주의나 인종주의, 전체주의 망령 따위가 반제국주의나 반자본주의와 손을 잡고 '좌파'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날 때 끔찍해진다.

 

과연 좌파란 무엇일까, 좌파의 '유전적' 특성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이 나의 내면에 떠오른 것은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로 떠오르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를 읽은 직후이다. 우연히 읽고 오래 뇌리에 남아 있던 "누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샤워는 좌파에 속하고, 목욕은 우파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것이다."(미셸 투르니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라는 재치 넘치는 문구, 그리고 앙리 레비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런 물음은 생겨나지 않았을 터고, 이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사르트로 평전>을 읽고, 그 다음에 소설가 우엘백과 함께 쓴 <공공의 적들>에 이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를 잇달아 읽게 되었다. 이 책들에 앙리 레비는 줄곧 자기가 좌파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그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우아하게도 '캐비어 좌파(우리식으로는 강남좌파다. 독일식 표현으로는 토스카나-파락치온(Toscana-Fraktion)이라고 한다. 부자이면서 프롤레타리아 편에 선다는 자들을 비꼬는 표현이다.)'라고 불린다는 사실이 내 흥미를 자극했다.

 

'좌파(Left)'라는 용어의 생산지는 프랑스이고, 말 그대로 '왼쪽'이라는 방향을 지시하는 명사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그 말이 처음 생겼을 때의 정황에 대해 한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어휘는 프랑스혁명이라는 급진적 민주주의 환경에서 생겨났다. 프랑스 제헌의회가 1789~1791년 국왕에게 남겨진 권한과 국왕의 거부권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을 때, 급진파는 의장 자리에서 볼 때 의회 왼쪽에 자리잡고 오른쪽에 자리잡은 보수파와 마주보았다. 이런 자리 배치가 뚜렸해지면서 '왼쪽', 즉 '좌파'는 국왕 거부권 폐지, 단원제 입법부, 임명이 아닌 선출에 의한 사법부 구성, 권력분립 및 강력한 행정부가 아닌 입법부의 우위, 그리고 -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 1인 1표의 민주적 참정권 등을 채택하는 강력한 민주주의 입장과 동일시됐다. 자코뱅 독재가 급진화의 절정에 달한 1793~1794년에 직업적인 상비군에 대립되는 민병대, 교권 반대, 누진세 등을 비롯한 추가적인 항목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민주적 제안들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아 19세기 정치적 풍경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것처럼,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도 유럽의 일반적인 어법으로 자리잡았다."(제프 일리, <The Left>) 물어보라, 당신의 자리가 '왼쪽'인가, 아니면 '오른쪽'인가를.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네 가지다. 첫째, 붉은색을 보면 흥분이 된다. 붉은색은 좌파의 표상이다. 그러니까 붉은색에 아무 이유없이 끌리는 사람은 생래적 좌파다. 둘째, 막무가내 현실불만자들. 이들은 가난, 실직, 불경기, 기후변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기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잘못은 외부에 있다. 어딘가 어긋한 외부만 제대로 된다면 세상은 정의로울 것이고, 가난이나 실직 따위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습관적으로 세상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반미주의자들, 즉 미국을 세계 악의 기축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대개 좌파다. 넷째, 북한 권력자들의 기이한 행태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이를테면 북한이라는 국가나 그 권력 행태는 특수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내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앙리 레비는 "자기 스스로 타인과 그들의 비참함의 육체적 인질로 여기는 데 동의한 인간만이 좌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만이) 타인의 입장에 서기 위해 융화도 감동도 없이 자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들이댄다면 한국 사회에는 좌파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좌파는 없다.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은 좌파를 사칭하는 사람들, 두 번째로 흔한 것은 좌파라는 겉멋에 이끌린 사람들, 그밖에 좌파 이념의 선동가, 전략가, 고고탐사학자들뿐이다. 내 판단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좌파는 가볍고 우파는 무겁다. 이때 가벼움은 경박함이고 무거움은 완고함이란 뜻이다. 그래서 좌파의 변신은 쉽지만(그 많은 전향자들!), 우파의 그것은 유전학적 형질이기 때문에 변신이 어렵다(그 많은 '꼴통' 보수 반동주의자들!).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은 다같이 필요하다. 먼저 가벼움에 대해. "우리에게는 가벼움이 필요하다. 가벼움은 세상의 균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결핍될 때 땅은 하늘을 잃고, 밤은 낮을, 어둠은 빛을, 깊이는 표면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겁고, 어둡고, 난해하고, 침울해진다. 그렇다, 가벼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안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가벼움의 힘이 있다. 무거움과 단절할 줄 아는 힘이다."(베르트랑 베르줄리,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

 

그 다음 무거움에 대해. "세상에 빛을 솟아나게 하는 섬광 같은 무거움, 아름다운 무거움은 중력의 중심점을 닮았다. 그것은 균형점이다. 균형점은 전혀 슬프지 않은 근본적인 몸짓에서 온다. 사물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하는 몸짓이다. 다시 말해, 일어나는 일을 판단함에서 중용을 지키는 태도를 말한다. 너무 적게도, 너무 많게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다. 이것이야말로 공정함이라 불러 마땅하다."(베르트랑 베르줄리, 앞의 책)

 

우파의 역할을 하는 좌파와 좌파의 역할을 하는 우파들이 뒤섞여 있는 한국 사회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균형이 필요한 사회다. 문제는 언제나 어느 한쪽이 넘치도록 많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양의 균형인데 말이다.

 

좌파는 남이 굷주렸을 때 울고, 우파는 오로지 자기가 굶주렸을 때만 운다. 좌파가 우는 것은 굶주리는 자에 대한 연민과 머지않아 자기도 굶주리고 죽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우파가 우는 것은 굶주림이 주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자기연민 때문이다. 좌파는 인류를, 더 구체적으로는 인류가 누려야 할 평등과 자유, 생태환경에 대해 걱정하고, 우파는 가족을, 가족의 안위와 사유재산들, 즉 밍크코트와 부동산과 은행금리에 대해 걱정한다. 좌파에게 가난은 자신이 세계의 악과 무관함을 증명하는 훈장이지만, 우파에게 가난은 굴욕과 무능력의 표지이다. 좌파나 우파나 거짓말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잘 관찰해 보면 작은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의 거짓말은 거시지향적이고, 우파의 거짓말은 미시지향적이다. 좌파의 거짓말은 미래와 관련되고, 우파의 거짓말은 과거와 관련된다. 얘기를 잘 들어보라. 우파는 회고하기를 좋아하고 회고 속에서 감미로움을 느끼지만, 좌파는 희망에 대한 신념에서 즐거움을 얻고 미래 속에서 펼쳐질 그들의 꿈을 이야기할 때 행복해진다. 우파에게 낙원은 지나간 과거 속에 있고, 좌파에게 그것은 다가올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대개 우파는 비관하고, 좌파는 낙관한다. 좌파은 증오의 힘으로 저를 지탱하고, 우파는 제 사유재산의 힘으로 저를 지탱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생물학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에서도 우파와 좌파는 상징적으로 갈라진다.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우파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학이고, 좌파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유전을 불가피한 운명에 속하고, 환경은 싸워서 개선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생물학의 유전적 특성은 우파에 더 가깝다. 생물학은 늘 검증된 것, 사실에의 집착, 새로운 것을 대하는 조심스러움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언제나 급진적인 진보가 출현하는 것은 생물학보다는 사회학 쪽에 더 자주 생겨난다. 그러니 사회학이란 좌파라는 늑대들이 빈번하게 출현하는 들판이다. 사회학은 좌파가 번성할 수 있는 학문적 생태계다. 새로 태어난 수십억의 어린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야 할 환경이다. 그 이전에 그들의 환경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유전적 형질에 다 들어 있다.

 

좌파의 붉은색은 피의 색이고,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색이다. 20세기 초에 마르크스주의에 고무되어 일어난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때 흐른 피로 적셔진 붉은 깃발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당신이 붉은악마들의 셔츠를 보고 생리적 불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우파일 가능성이 크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자유와 평등의 한편이 다른 한편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한편이 다른 한편에서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평등이라고 하는 화강암 속에서 자유가 발파됨과 동시에 자유의 논리 속에서 평등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며 해방의 욕망에서 돋아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되는 것이다."(앙리 레비,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타락하면 좌파건 우파건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다. 그때 좌파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고, 우파는 '짐승의 얼굴을 한 탐욕자'이다. 항상 우파가 더 나쁜 것이 아니듯 좌파가 항상 나쁜 것도 아니다. 좌파건 우파건 도덕적 진부함에 빠질 때 타락한다. 나쁜 것은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바로 그들, 타락한 자들, 악의 진부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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