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꽃게 이야기 / 김선태

샌. 2008. 7. 26. 17:24

흔히 보름 게는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왜냐구요? 이놈들은 주로 보름 물때에 탈피를 하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여, 겉은 번지르르 해도 속은 텅 비어 있으니 그야말로 무장공자無腸公子라는 말씀이지요.

허나, 서해 어느 갯마을에는 이 속설을 살짝 뒤집은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지요. 보름달이 뜨면 괜시리 시골 처녀들이 밤마실을 나가듯 야행성 꽃게들도 먹이 활동을 나간다지요. 그런데 달빛이 하도나 밝아 물속까지 훤히 비추면서 꽃게들도 그림자를 드리우니, 아 글쎄 제 그림자인 줄을 모르는 이놈들은 등 뒤의 무슨 시커먼 물체에 화들짝 놀라 삼십육계 게걸음을 친다는 겁니다. 한참을 쫓기다 이젠 안 따라오겠지 하고 돌아보면 따라오고 잠시 바위틈에 숨었다가 나가도 다시 따라오니 참 그만큼 징상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밤새도록 줄행랑을 치다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날이 새니 보름 게는 살이 오를 겨를이 없을 뿐더러 있는 살까지 죄다 내려 속빈 강정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어허, 그런데 말입니다. 호랑이 앞에서도 집게발을 쳐들고 대드는 용기를 가진 이놈들이 그깟 제 그림자에 속아 도망을 치다니 참 우습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놈은 다름 아닌 제 그림자 아니 제 자신이 아니었을까요?

- 꽃게 이야기 / 김선태

지혜는 말한다. 우주는 마야(MAYA), 즉 그림자[幻影]이다. 마야란 개인의 무지(無知)가 우주적으로 확대된 것이다.무지란 공(空)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상태이고,성내고 욕망하고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원인은모두 무지에서 나온다. 제 그림자에 속고 있는 것이다. 꽃게만 어리석다고 비웃을 일이 아니다.

다른 지혜는 말한다. 사랑하라! 노래하라! 춤추라! 일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또 다른 지혜는 말한다. 이 세상은 현명한 자에게는 놀이터이지만, 어리석은 자에게는 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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