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 김산

샌. 2023. 9. 20. 10:00

앞마당의 벚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큰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잎들을 쓸기 시작하면

바스락거리며 오그라든 당신의 지문이 조각조각 바서진다

바람과 빛과 물이 일제히 분열하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검지까지 쭉 뻗은 감정선과 손목으로 가다 끊긴 생명선

그래, 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빗자루가 쓸리면서 빗자루가 아플 것이라는 생각에

빗자루질을 멈추고 떨어지는 잎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붙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벚나무 잎을 보면서

어디서 불어왔는지 찬바람이 오른뺨을 할퀴고 간다

뺨으로 누구를 때렸다거나 해코지를 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기껏해야 뺨은 누군가의 뺨을 비비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온기를 나누는 게 다일 뿐,

다시 빗자루를 잡고 떨어진 벚나무 잎들을 쓸기 시작한다

빗자루로 떨어진 잎의 뺨을 비비면서 언젠가 그 뺨을 타고 흘렀을

눈물의 길을 새롭게 닦아내기 시작한다

떨어진 잎들은 결코 버려지거나 낙오한 것이 아니다

바닥에 대고 무언가 할 말이 있어 가뿐하게 하산한 것이다

더 이상 매달려 있는 것도 지겨워,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놓았다고 죽은 것이 아니듯 비로소 놓았으므로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오르는 당신의 지금을

 

나는,

 

지극히,

 

사랑한다

 

- 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 김산

 

 

두 주 전부터 장모님이 노인요양센터에 나가신다. 아침에 나가시면 센터의 프로그램대로 생활하시다가 저녁에 돌아오신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운동이나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게 재미있으시단다. 어느 날 센터에서 장모님은 조카를 만났다고 젖은 목소리로 알려왔다. 조카는 장모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더란다. 늙어 정신이 흐릿해져서 센터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벚나무 잎처럼 모든 생명붙이들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개체의 생성과 소멸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체가 경험해야 할 사소한 사건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존재가 엮어내는 수많은 인연의 끈을 어찌 사소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가을바람에 떨어진 벚나무 잎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빗자루를 든 이도 언젠가는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소함을 살아가는 가련하면서 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오르는 당신의 지금을 / 나는 / 지극히 /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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