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못 먹는다

집에는 냉장고가 세 대 있다. 두 노인이 사는 집 치고 과하지만 전에 자식들과 같이 살 때 쓰던 냉장고가 고장 없이 작동하고 있으니 계속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아내에게 한 대를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다 쓸모가 있다고 한다. 부엌 살림살이는 아내 소관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세 대의 냉장고는 어디를 열어봐도 빈틈없이 뭔가가 가득 들어 있다. 둘이 사는 살림에 무슨 먹을거리가 이토록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내조차도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뭘 찾자면 이 냉장고 저 냉장고로 왔다갔다 한다. 냉장고만 아니라 옷장도 마찬가지다. 십 분의 일로 줄여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냉장고 문을 열면서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늘어난 말이다.

"이런 게 있었다니!"

"이건 뭐야?"

"어디 뒀는지 못 찾겠다."

"몰라서 못 먹는다니까."

 

그러면 나는 못마땅해서 중얼거린다. "또 시작한다." 남 탓 할 처지가 아니다. 나 역시 깜빡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원체 숫자에 약하지만 어떤 때는 현관 앞에서 머리가 하얘진다.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아 내 집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이러다 보니 휴대폰 메모장에는 현관 비밀번호와 자동차 번호가 적혀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숫자 외우는 데 더 젬병이 된 것 같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헤매는 건 다반사다. 그래서 꼭 두는 위치가 정해져 있다. 주변을 단순화하는 것이 "아차"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이 탓이 제 일 원인이지만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꾸 줄어드는 뇌 능력이 복잡한 삶을 따라가지 못한다. 냉장고 세 대의 용량을 아내의 뇌는 감당하지 못함이 분명하다.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듯이 빈 공간이 있으면 불요불급하더라도 채워넣게 된다. 아내는 주로 인터넷 쇼핑을 하는데 할인이나 '1+1'을 엄청 좋아한다. 싸게 파는 걸 샀다고 수지맞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 물품이 냉장고 속에서 잊힌 채 하염없이 갇혀 있다. 그러다 유효기간이 지나서 폐기처분을 한다. 결과만 보면 싸게 산 게 아니다.

 

냉장고만 문제가 아니다. 집안을 둘러보면 두 몸뚱이를 건사하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지 의아해진다. 어느 집이나 그럴 것 같다. 정리를 대대적으로 하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인한테서 정리전문가한테 집안 정리를 맡긴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필요 없는 옷이나 물건을 몇 보따리나 버리고 깔끔해졌다고 한다. 우리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때 냉장고를 하나 줄이라는 충고를 아내에게 해 줬으면 좋겠다. 남편 말은 듣지 않아도 전문가 말이라면 귀를 기울일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무한으로 부추기는 시스템이 아닌가. 자본주의는 절제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아니면 자본주의가 지탱할 수 없다. 현대인은 조금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더 큰 집이나 고급차를 갖기 위해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하는 생존경쟁에 내몰린다.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는 자신이 시스템의 노예인 것도 모른 채 당연하다는 듯 현실에 복무한다. 집안에는 없어도 될 물건들이 차고 넘친다. 신제품이 나왔다는 이유로 멀쩡한 물건이 구석에 처박힌다.

 

훗날 실버타운이나 요양원에 들어갈 때 집안에 있는 이 수다한 물건들은 대부분 폐기처분될 것이다. 한꺼번의 벼락치기가 아니라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떠나보내는 연습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제는 취할 때가 아니라 버리고 간소해질 때다. 가난한 이웃과 지구 환경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몰라서 못 먹는다'는 무심코 내뱉을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낭비하거나 사치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박봉의 공무원 보수로 아내의 검약과 내핍이 없었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70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가고 있다. 뺄셈의 나이가 되었다. 다이어트로 몸무게를 빼는 것보다 더 중요한 빼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욕망의 달음박질에서 벗어나 느린 강가에 앉아 곱게 번지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