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140

조심과 방심 사이

발바닥에 이상이 느껴진 게 3년 전이었다. 많이 걸으면 따끔거리며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심하지는 않으니 우선 걷는 걸 자제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긴 거리의 트레킹이나 등산을 쉬게 되었고, 집에서는 쿠션이 넉넉한 슬리퍼를 신었다. 조신하고 몇 달을 보냈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작년까지 집 부근에 있는 낮은 산에만 드문드문 다녔지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았다. 제일 높이 올랐던 게 600m급의 파주에 있는 감악산이었다. 그 정도면 거뜬해서 발은 다 나았다고 판단하고 몇 달 전부터 등산을 재개했다. 아직 높은 산은 아니지만 - 발보다도 이제는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어 -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올랐다. 산에 드는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북한산 숨은벽에 다녀왔는데 다시..

길위의단상 2022.05.13

친구와 지인

"나에게 친구가 있는가?" 가끔 해 보는 자문이다. 여러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친구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관계로서의 친구라면 다들 고개가 저어진다. 인생에서 한 명의 진실된 친구를 가지는 일이 쉽지 않다. 당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거나, 산길을 같이 걷거나, 또는 학교 인연으로 만나서 옛날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임이 있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저 같은 즐길거리를 공유하는 아는 사이라고 해야 맞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관계는 아니다. 나를 성찰하게 해 주며 우정 속에서 서로 성장해 나갈 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잘 나갈 때는 ..

참살이의꿈 2021.12.15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어린 손주를 보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나를 위해 있고, 친구나 장난감도 마찬가지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걸 헤아릴 능력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듯 동화 나라에서 살아간다. 어른 눈에는 그런 행동마저 마냥 귀엽게 보인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배웠다. 배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구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배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꼭 신체만이겠는가. 인간의 정신도 인류 여명기의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차례대로 답습하며 성장해 나가는 건 아닐까. 5백 년 전까지도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거치며 사람들에게 지동..

참살이의꿈 2021.12.07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사람을 쬐다 / 유홍준 밤골에서 살 때 비어 있던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찾지도 않았다. 어떤 사연으로 산골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

시읽는기쁨 2021.12.05

작별 일기

노약한 부모를 실버타운에 모신 뒤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2016~2018)의 기록이다.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가 부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면서 구술생애사 작가면서 딸인 최현숙씨가 썼다. 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이며/특수한 과정이 애틋하면서 또한 담담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작가를 포함한 남매들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 집 남매들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정성은 각별하다. 지은이는 2008년부터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맡아왔다. 그 경험이 본인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

읽고본느낌 2021.11.19

개의치 않으련다

늙어가면서 신체와 정신에 변화가 생긴다. 둘을 비교한다면 정신보다는 신체의 변화가 더 빠르고 큰 것 같다.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하듯이, 노년이 되면 육체가 정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물론 정신이 먼저 문제가 생기는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이 크게 엇박자를 내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나란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진입한 나를 관찰해 보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변화가 느껴진다. 전에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을 썼다. 내 언행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먼저 살폈다. 그래서 늘 조심했고, 동시에 실수를 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이것은 내 오래된 습(習)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

참살이의꿈 2021.11.18

바깥 잠과 수면제

어제저녁에는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8시였다. 10시간 정도 잠을 잔 것이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다. 보통 저녁 10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난다. 나는 하루에 아홉 시간 정도 잠자는 '롱 슬리퍼(long sleeper)'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는데 나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아홉 시간 동안 내내 자지만, 어쩌다 오줌이 마려워 한 번쯤 깰 정도다. 이만하면 잠 복은 타고난 것 같다. 넌 심간이 편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하지만 나라고 세상 살아가는 염려나 스트레스가 덜한 건 아니다. 타고난 체질일 뿐이다. 그런데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밖에 나가서 잘 때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달라진 잠자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선 베개 높이가 달..

길위의단상 2021.11.17

30%

당구 모임이 있는 날 저녁에는 편의점 야외 탁자에서 캔맥주로 입가심을 한다. 술집보다 경제적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밀폐된 실내보다 안전해서 좋다. 출입구 옆이라 옹색하긴 하나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유럽의 야외 카페가 부럽지 않다. 그렇게 동기들끼리 만나면 옛날 학창 시절의 추억담이나 앞으로 살아갈 노년의 삶 따위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건강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등산 모임이 하나둘씩 없어진다. 등산 공고를 하면 전에는 북적댔는데 이제는 서넛밖에 나오지 않으니 산 대신 둘레길 같은 수월한 걷기로 대체된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제는 한 친구가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인구 통계로 볼 때 남자 80세가 되면 생존율이 30% 정도라는 것이다. 이미..

길위의단상 2021.10.16

백세 일기

모임에 나가면 김형석 선생님이 자주 화제가 된다. 자기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자처하는 이도 있다. 선생님은 192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102살이다. 그런데도 한 해에 100회가 넘는 강연을 다니시고, 꾸준히 책도 내신다. 가 작년에 나왔으니 101살에 쓰신 책이다. 예로부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아무리 장수시대라지만 아흔을 넘기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백세를 채우고도 여전히 정정하다니 부럽다 못해 질투가 생긴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한다고 되는 일일까. 아무튼 대단한 복을 타고나신 분이다. 선생님은 쉼없는 공부와 일을 강조하신다. 삶의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공부와 일을 놓치지 않는 사람에게 노년기는 없다. 65세..

읽고본느낌 2021.10.12

은퇴자가 노는 법

단톡방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글이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 올리는 걸 보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가 보다. 내용은 이렇다. 보편적 대한민국 노인 백수의 노는 법은, 1. 주야장천 배낭에 막걸리 한 병 넣고 청계산에서 북한산으로 휴대폰에 미스트롯 뽕짝 백 곡 깔아 볼륨 맥스로 틀어 놓고 무릎 연골 남아 있을 때까지 심마니 흉내 내며 살아가기. 1. 손주가 좋아 죽겠다고 카톡 프로필까지 손주 사진으로 도배해 놓고 할아버지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7살이 될 때까지 보육원장 놀이하기. 1. 허리가 온전한 그날까지 선블록 떡칠하여 전국 골프장 순회하며 나이스 샷에 중독되어 닐니리야 하다가 죽을 때도 호주머니에 티 넣고 화장터 가기. 1. 30만 원 들여 방통대 중국어과에 등록하여 뭔가 좀 남달리 학구적으로..

길위의단상 2021.09.26

무심하게 산다

제목에 끌려 고른 책이다. 가쿠타 미쓰요(角田光代)라는 일본 작가의 에세이로, 제목을 봤을 때는 작가가 노년이 아닐까 싶었는데 1967생이다. 책에 실린 글은 대개 40대 중후반에 썼다. 무심하게 산다고 하기에는 젊은 나이다. 작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찰이 주된 내용이다. 나이을 먹어감에 따라 생기는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일본 여성 특유의 감성이 살아 있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아마 여자라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의 원제가 인데 '나란 사람을 담는 그릇' 쯤으로 해석되는가 보다. 그릇은 몸이지만 그 내용물은 성질이나 성격이어서 나이가 들면서 변해가는, 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읽고본느낌 2021.08.23

살아나는 꿈

아내는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몇 차례 텃밭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몰두하는 것은 처음 본다. 수확해서 먹는 것은 둘째고, 작물을 심고 기르는 즐거움이 우선인 것 같다. 텃밭과 채소 얘기를 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돈다. 텃밭과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이번에 얻은 텃밭은 집 옆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텃밭에 나간 것이다. 돌아올 때는 큰 비닐봉지에 뭔가가 한가득 들어 있다. 아내의 얼굴 표정도 밝고 환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얼굴이 부은 채 방에서 나왔을 터였다. 아내의 건강에도 텃밭이 일조를 하고 있다. 내년에도 계속 텃밭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텃밭을 포함한 주변 땅에 아파트 공사가 예정되..

참살이의꿈 2021.08.18

후배의 독서당

후배 H가 북한강변에 독서당(讀書堂)을 마련해서 조용히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는 얘기는 연전에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마침 통화가 되었고, 몇 번 약속이 어긋나다가 마침내 어제 찾아가 보게 되었다. H는 교직에 있으면서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 학위를 딴 학구적인 후배다. 퇴직을 하고 책을 원 없이 읽고 싶다며 남양주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강변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의 2층에 세를 들어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한 소박한 오두막과 달리 넓고 럭셔리했다. "언제 이렇게 부르주아로 변신한 거야?"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인 거죠."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후배가 대견하고 부러웠다. 나도 세컨드 하우스 개념의 이런 공간 하나 빌리고 싶은 것..

참살이의꿈 2021.06.22

늙어서 그래요

대상포진을 맞이한 지 50일이 지났다. 이제야 종착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얼굴에 난 포진은 3주 정도 지나니 아물었지만 가려움증의 여진은 계속이다. 개미 한 마리가 멋대로 내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다. 대상포진은 뒤끝이 사나운 질병이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끈질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내 발로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요." (젊은 의사는 "노화 탓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늙어서 그래요. 시간이 약이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세요.") 서운했으나 의사 말이 틀리지 않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년이 되니 이상이 생긴 뒤의..

길위의단상 2021.06.05

시들하다

70이 코앞에 다가오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많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몸이 예전 같아 않아, 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너 시간은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시간만 연속으로 걸어도 지친다. 하루를 활동하면 다음날은 쉬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잠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싹 가셨지만, 이젠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몸에 정신이 박자를 맞추는지 매사가 시들하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 의욕만 앞서다가는 탈이 날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는 다행인지 모른다. 늙으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다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같이 등산을 했던 그룹은 지금도 산을 열심히 다닌다. 나는 작년과 올해에 500m 넘는 산을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참살이의꿈 2021.04.17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노년에 경계할 것

감이 익어 홍시가 되듯 사람은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늙으면 바람 불듯 물 흐르듯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가당찮은 생각이다. 잘 익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에 들어서고 보니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자기 독단에 빠지는 일이다. 노인은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하면 자신의 경험을 과대 해석하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하나의 전문 분야에 평생을 보낸 사람일수록 이런 성향이 강하다.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기준이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을 흔하게 본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목소리가 크고 모임을 주도한다. 동조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므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한다. 이런 함정에 빠지면 ..

참살이의꿈 2021.03.01

갈 때 되면 가야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라고 말하며 나를 깨우치겠다고 새해의 마음 다짐을 했다. 보름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다. 죽는다는 -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 의식이 내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한다. 좀 더 초연해진다 할까, 세상사의 헛됨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때는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날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죽음에서 예외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열심히 살..

참살이의꿈 2021.01.16

어떤 실수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 아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

길위의단상 2020.12.15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던 동네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전파상이 있고, 콩나물 할머니가 앉아 있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분주했던 골목길을 비롯해 모든 ..

시읽는기쁨 2020.11.20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

시읽는기쁨 2020.11.12

마음대로 안 된다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길위의단상 2020.10.16

하이쿠로 본 노년

일본노인요양협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이쿠를 모집해서 입상작을 뽑고 있다. 매년 여는 행사라고 한다. 아래는 올해의 수상작이다. 나도 이제 노년에 들고보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월을 이길 장사가 있는가. 몸과 정신이 쇠해지는 걸 지긋이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일본 노인의 심정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연상이 이상형인데 더 이상 없어 전철 개찰구 안 열려 봤더니 이거 진찰권 LED 전구 내 남은 수명으로는 다 쓰지도 못해 도쿄 올림픽 어디서 보려나 하늘인가 땅인가 이생의 미련 없다고 하지만 지진엔 도망가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손글씨 사실은 손떨림 사랑인 줄 알았건만 부정맥 펜과 종이 찾는 도중에 쓸 문장 까먹어 세 시간 기다려 진찰받은 병명 노환 의사가 갑자기 상냥해지면 불안해 만보계 절반 이..

참살이의꿈 2020.10.04

게으름을 자랑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행동이 굼뜨다. 어려서부터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부모님이 걱정했는데, 학교생활이야 그럭저럭했지만 군대에 가서는 고생 좀 했다. 훈련받을 때 선착순에서는 맨날 꼴찌여서 기합은 도맡아 받았고, 자대에 가서도 고참한테 어지간히 잔소리를 들었다. 나 같은 졸병을 둔 고참도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다행히 행정병이라서 그나마 군대 3년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활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만히 혼자 있는 게 특기다. 책 한 권만 던져주면 종일을 심심치 않게 보낸다. 바깥출입 없이 몇 달이라도 혼자서 재미나게 지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단점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남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하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다. ..

참살이의꿈 2020.09.09

수컷의 유효기간

동물 수컷은 나이 들고 힘이 떨어지면 쓸모가 없어진다. 생식 기능이 없고, 사냥도 못 하고, 무리를 지켜주지도 못한다면 수컷의 가치를 어디서 찾겠는가. 반면에 보살핌과 살림이 역할인 암컷은 늙어서도 효용가치가 남아 있다. 최소한 음식을 장만하고 손주를 봐줄 수는 있다. 그래서 암컷의 평균수명이 수컷보다 긴 것은 자연선택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인간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대부분 암컷의 수명이 수컷보다 20% 정도 길다. 백수의 왕자라는 사자의 세계에서 늙은 수사자는 천덕꾸러기다. 힘에 부쳐서 젊은 수사자에게 패하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광야를 헤매다가 죽는다. 그나마 암사자가 사냥해 오는 먹이를 받아먹다가 졸지에 혼자가 되면 제 먹이조차 구하지 못한다. 무리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늙은 수사자는 가차 없이 ..

참살이의꿈 2020.08.03

막걸리 한 병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

참살이의꿈 2020.06.15

여기 있는 게 좋아

텃밭을 부치는 이웃이 세 집이나 있다. 덕분에 야채는 떨어지지 않고 얻어먹는다. 연초에 아내가 우리도 텃밭을 하나 해 볼까, 라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 여기는 조건이 좋다. 집 가까이에 노는 땅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경계를 긋고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작물 가꾸는 것도 시들해졌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에 매인다는 게 싫다. 대신 이웃이 부치는 텃밭은 가끔 들린다. 오늘 오후에 텃밭에 나가는 이웃을 따라나섰다. 방 한 칸 정도 되는 넓이의 땅뙈기에는 상추, 배추, 쑥갓, 완두콩, 고추, 딸기가 심겨 있다.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텃밭들이 있고, 가끔 밭에 나와 있는 다른 사람과도 만난다. 오늘은 할머니 한 분이 옆에서 일하고 계셨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이웃분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길위의단상 2020.06.13

별일 읍지 / 정수경

누구냐 니째여? 시째라고? 느덜은 목소리가 똑같어. 전화소리는 더 못 알아 보것어. 교회여. 목사님이 죽어도 교회 와서 죽으랴. 오는 길에 행사장 들러서 치료도 받았어. 당뇨에 좋다는디 댕긴지 얼마 안돼서 그란지, 당이 안 떨어져야. 자꾸 댕기믄 좋아 진당깨 빼먹지 말고 댕기야 긋어. 거기 가서 치료 받은깨 감기는 그만 한디, 인제 살만햐. 사람들이 가믄 기분 좋게 놀아줘. 젊은이들이 참 싹싹햐. 느들은 나 그렇게 기분 좋게 못해줘야. 미안 하니깨 치약 같은 거 하나씩 팔아줘. 어떤 이는 거그서 파는 약 먹고, 안마기 치료도 받고 했다는디 당이 그짓말처럼 떨어졌댜. 피도 맑아지고. 내가 무신 돈이 있간디. 비싼 약 같은 건 안 사니깨 걱정 말어. 야 근디 느 아들 잘 있다지야? 내가 새벽마둥 기도햐. 무..

시읽는기쁨 2020.06.11

다람쥐가 되어 간다

# 1 공돈 20만 원이 두 달 전에 생겼다. 요긴할 때 쓰려고 책장에 있는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 젊을 때부터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 두곤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으면 아무 때나 꺼낼 수 있으니 비밀 보관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심이 간다고 많은 책을 전부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돈이 필요해서 책장 앞에 섰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손이 자주 가는 책을 중심으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아무리 두 달 전 상황을 더듬어도 깜깜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20만 원은 훗날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졌다. # 2 도서관에 갈 때마..

길위의단상 2020.02.06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아침저녁 한 웅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요즘 들어 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친구가 말했다. 시내에 나간 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헷갈린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영민했던 친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변해간다. 우리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시읽는기쁨 202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