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이젠 칠십인 걸

샌. 2022. 7. 6. 10:32

언제부턴가 집안에 파리랑 벌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날벌레도 들어왔다. 파리채를 열심히 휘두르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텃밭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베란다의 방충망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헐~, 그동안 한여름에 방충망 없이 산 것이었다.

 

둘 중 누군가가 방충망을 열고 난 뒤 닫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더듬어봐도 방충망을 연 기억이 안 났다. 나는 아니라고 서로 부정하면서 상대를 의심하는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론은 늘 같았다.

 

"우리 나이가 얼마지?"

"이젠 칠십인 걸!"

 

나이 70이 넘고 보니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심리적으로도 노인이라는 사실에 위축이 된다. 공식적인 노인의 기준은 65세지만 장수시대라서인지 그 나이에 노인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데 70이 되니 다르다. 불연속적인 변화의 경계를 경험한다. 순간에 확 늙어버린 것 같다.

 

옛날 생각을 하면 70대 할아버지는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 어릴 때의 할머니나 할아버지 연세는 그 당시에 50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얼마나 늙게 보였던가. 지금의 내 나이를 생각하면 둘 사이 인식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고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이제 70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따라서 늙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지난주에 탁구장에 갔을 때 여든일곱 되신 분과 탁구를 쳤다. 드라이브가 어찌나 센지 내 반응 동작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여든에도 젊고 활기차게 사시는 분도 있다. 그러나 특별한 케이스와 나를 비교할 수는 없다. 나는 노인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노인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70이 넘으니 이젠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내일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게 없다. 만약 병이 걸린다면 이젠 갈 때가 되었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인다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영화 '기도하는 남자'에 나오는 한 대사가 있다. 간암 말기여서 죽음을 앞둔 분이 딸에게 하는 말이다. "죽는 게 뭐가 무섭니. 사는 게 무섭지." 요사이 내 심정도 그렇다. 삶에 대한 집착을 놓은 사람에게는 죽음조차도 무섭지 않다. 그러함에도 작은 일상에는 여전히 아옹다옹하며 살아갈 것이다.

 

몸은 느려지고 정신은 깜박깜박 한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아내한테서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럴 때 체념하며 나는 중얼거린다.

"이젠 칠십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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