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은퇴자가 노는 법

샌. 2021. 9. 26. 11:34

단톡방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글이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 올리는 걸 보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가 보다. 내용은 이렇다.

 

보편적 대한민국 노인 백수의 노는 법은,

 

1. 주야장천 배낭에 막걸리 한 병 넣고 청계산에서 북한산으로 휴대폰에 미스트롯 뽕짝 백 곡 깔아 볼륨 맥스로 틀어 놓고 무릎 연골 남아 있을 때까지 심마니 흉내 내며 살아가기.

 

1. 손주가 좋아 죽겠다고 카톡 프로필까지 손주 사진으로 도배해 놓고 할아버지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7살이 될 때까지 보육원장 놀이하기.

 

1. 허리가 온전한 그날까지 선블록 떡칠하여 전국 골프장 순회하며 나이스 샷에 중독되어 닐니리야 하다가 죽을 때도 호주머니에 티 넣고 화장터 가기.

 

1. 30만 원 들여 방통대 중국어과에 등록하여 뭔가 좀 남달리 학구적으로 보여 친구들 앞에서 공부한다고 떠벌리며 장가계 패키지여행이 다시 열릴 날 기다리며, 장학금 받기 위해 에어컨 잘 나오는 동네 도서관에서 기말시험 공부하며 치매 극복하기.

 

1. 말죽거리에서 쓰리쿠션 치다가 저녁에 영동족발에서 막걸리 마시고 '59년 왕십리' 읊으며 집으로 가기.

 

1. 옆집 눈치보며 색소폰 대가리에 뮤트 끼워 자뻑 예술 하다가 비 오는 날 양재천 다리 밑에서 소원 없이 빽빽거려 보기.

 

1. 박물관, 미술관을 순회하며 노년의 품위에 맞게 심오한 예술적 기품을 심겠다고 경복궁 담벼락 옆 현대미술관에서 먹줄 몇 가닥 튕긴 300호 대형 추상화 앞에서 귀신 튀어나올 때까지 서 있거나 인문학적 소양을 업하기 위해 장 쟈크 루소의 800페이지짜리 <에밀>부터 칸트 형님의 <순수이성비판>까지 돋보기 끼고 수면제 먹기.

 

1. 저 푸른 초원 위에 전원주택을 짓고 좋은 공기 마시며 내 입에 들어갈 풀 쪼가리는 유기농으로 내가 키워서 먹겠다고 인터넷으로 온갖 씨앗 봉지는 다 사서 남새밭에 뿌리고 주말이면 친구들 불러서 장작불에 삼겹살 구워 먹을 생각으로 텔레비전 삼시세끼 프로그램처럼 살아가기, 아니면 그것도 성에 안 차서 아예 귀농하여 태백산 골짜기로 입산하기.

 

1. 이미 한물간 큼직한 DSLR 카메라에 묵직한 접사렌즈까지 달고 뒷산에 흔하게 핀 야생화 앞에 안쓰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눌러대어 자기가 봐도 정말 잘 찍었다며 SNS에 올려 자랑하기.

 

1. 실업자에게 국비 지원으로 공짜로 해 주는 바리스타 교육 받고 집에서 커피콩 볶다가 휘슬러 프라이팬 다 태우거나, 폼나게 살기 위해 만화 <신의 물방울> 44권 마스터하고 이마트 5천 원짜리 와인으로 디캔팅하여 맹물 만들기나 하면서 클래식과 재즈까지 곁들여 마이가리 품격 라이프 즐기기.

 

1. 종교적 신념으로 (이건 뭐라고 쓰고 싶지만 클레임 들어올 것 같아서 포기) 하느님과 부처님 모시고 살아가기.

 

1. 그냥 낚시터에서 찌만 쳐다보며 평생 살기.

 

1. 배달되는 조선일보를 처음부터 사설까지 혼잣말로 대통령 욕 곁들여가며 완독하고, 삼식이로서의 당연한 의무인 분리수거를 마치고 와이프가 이마트나 코스트코 갈 때 짐꾼 겸 기사 노릇으로 뿌듯함을 만끽하기.

 

1. 디지털 청첩장 받아 유행이 살짝 지난 기장이 약간 길고 헐렁한 양복 아래위로 걸치고 간 예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렇게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뷔페 퍼다 나르면서 정치와 코로나 이야기로 입에 거품 좀 내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기.

 

1. 존재감 없는 단체 카톡방에서 남이 퍼올린 글 읽어보다가 공감이 가면 또 퍼다가 다른 데 옮기면서 남들도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며 휴대폰 가지고 놀기.

 

1. 가끔 약속도 없고 심심하면 밀리터리 캡 쓰고 황학동 벼룩시장에서부터 모란역 5일 시장터까지 기웃거리며 근처 칼국수집에서 한 끼 때우며 한나절 보내기.

 

물론 코로나가 끝나면 달라지겠지만, 바다 건너로~~

 

 

이 글은 분명 노년의 경험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약간은 자조적으로 쓴 것 같다. 노년이 되면 많은 것을 잃는다. 세상을 즐길 체력과 정신이 고갈되어 간다. '화려한 백수'니 '로맨스 그레이'니 아무리 멋진 말로 은폐해도 야속한 세월과 씨름해서 이길 수는 없다. 은퇴 후 얼마 동안은 마지막 불꽃이 반짝하는 시기다. 나름의 재미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 발악하는 모습이 괜스레 쓸쓸하다.

 

나이가 들면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다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배우고 잘난 놈은 약간 더 고상한 척 폼을 잡지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이 또한 공평한 세상의 원리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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