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손과 코

샌. 2021. 8. 16. 11:25

일전에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가 고추 따는 일을 도와드렸다. 고작 두 시간 정도 되었을까, 고추밭에서 나오니 손톱에는 온통 풀물이 들어 있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얼얼했다. 고추를 따느라 엄지가 눌려서 압박을 받은 탓이었다. 나중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고, 그날 밤은 잠을 설쳤다. 사흘이 지난 아직까지 통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손은 내 몸에서 콤플렉스 중 하나다. 내 손은 유난히 조그맣다. 여자 손보다 더 여자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악수하기가 싫어졌다. 다른 사람의 크고 투박한 손에 잡히면 나는 이미 한 수 접히고 들어간다. 더구나 기를 죽이려는 듯 한 마디를 보태는 사람도 있다. "야, 남자 손이 뭐 이 모양이냐?" 아무리 감추려 해도 손을 통해 백면서생이라는 게 들통나 버린다. 노동 현장의 땀과 경력이 묻은 손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농촌에서 자랐지만 나는 농사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 도울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게 부모님의 분부였다. 내 손이 거친 환경에 노출될 일이 없었다. 오직 펜대를 잡고 책장을 넘기는 데만 썼으니 안 그래도 작은 손이 발달하지 못하고 이 꼴이 되었다. 작고 하얗고 연약한 손, 여자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부끄러움이다. 나는 가능하면 손이 노출되는 걸 피한다. 그래서 장갑을 끼는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자는 손가락이 길어서 미끈하기라도 하지, 내 손은 작으면서 짜리몽탕하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냐며 아무리 이쁘게 봐 주려해도 안 된다. 젊었을 때 기타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가 금방 접은 적이 있었다. 가르치는 분의 길고 멋진 손가락에 열등감을 느껴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의 손가락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또한 코드를 집자면 내 손은 두 배나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내 한계를 빨리 알아차린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몸에서 두 번째 콤플렉스는 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후 무렵일 것이다. 집에 들르러 오신 큰어머니가 내 잠자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하셨다. "얘는 귀가 잘 생겼고, 코만 보통이면 좋을 텐데." 나는 어설피 잠이 든 상태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고, 내 코가 못 생겼다는 걸 그때 처음 인지했다. 그 기억이 오래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어린 나이에도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사춘기가 되어서 신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코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작다는 걸 느끼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코는 남자에게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코를 만지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시기였다. 그때 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코가 커지지 않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약점을 들켜버린 심정은 고약했다.

 

손은 감출 수 있지만 코는 그렇지 않다. 얼굴 가운데에서 우뚝하게 솟아 노출되어 있는 부위다. 성형 시술 1위가 눈이고, 다음이 코라고 한다. 여자에게도 오똑한 코는 미인의 상징이다. 아마 옛날에 성형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었다면 나는 콧대를 높이는 시술을 고민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는 다르게 굴러갔을 것이다." 코는 세계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가까운 지인 중에 코를 다듬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40대가 된 늦은 나이의 남자였다. 고객을 많이 접하는 직업이라 인상이 중요했다고 한다. 그의 코는 그리스 조각상처럼 멋지게 만들어져 장착되었다. 성형외과가 번창하는 이유를 직접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마음이 동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제 와서 내 코에 감탄할 사람을 헤아려 보니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를 바꾸었는지도 모를 무심한 친구 앞에서 내 자존심은 더 구겨질지 모른다.

 

자신의 몸에 대해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는 부위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도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만의 고민인 경우가 흔하다. 타인은 내 손과 코가 작든지 크든지 관심이 없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양 스스로 속앓이 할 뿐이다. 이걸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존감이 약하면 콤플렉스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 본다. 늙은 손은 굵고 도드라진 혈관과 쭈글쭈글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피부도 탄력을 잃어서 잡았다 놓으면 원래대로 펴지는 데 10초도 넘게 걸린다. 여기에 작은 손 콤플렉스가 자리할 공간은 없다. 나는 손등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인다. "수고했다, 내 작고 예쁜 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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