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귓꺼풀도 있었으면

샌. 2021. 8. 24. 10:45

하느님이 인체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드셨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 눈꺼풀을 만드실 때 귓꺼풀은 왜 안 만드셨을까? 눈과 귀는 인간의 대표적인 감각 기관이다. 전방의 경계 초소와 같다.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약육강식의 험한 자연환경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경계병도 쉬어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은 눈을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지만, 귀는 소홀히 하셨다. 몸은 잠들어도 귀는 잠들 수 없다.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은 피곤하다. 그중에서도 주범은 소음 공해가 아닐까. 도시인은 24시간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도한 소음에 노출되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일에 집중할 수 없다. 하느님은 선견지명이 그리 없으셨나. 이럴 때 귓꺼풀이 있어서 마치 눈꺼풀 닫듯이 닫아버리고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층에는 올빼미 가족이 산다. 밤 2시까지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주 잠을 설친다. 부지런한 올빼미 때문에 요사이는 수면 질이 엉망이다. 음악 방송을 틀기도 하고, 오디오 북을 듣기도 하지만 소리로 소리를 제압할 수는 없다. 이이제이(以夷制夷)는 되는지 몰라도 이성제성(以聲制聲)은 안 된다. 원망은 드디어 하느님한테까지 이른다. 귓꺼풀만 만들어주셨어도 이런 쓸데없는 고통은 안 겪을 것 아닌가.

 

만약 내장된 귓꺼풀이 있다면 한밤중에 윗층의 올빼미들 때문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카페에서건 버스에서건 옆자리의 수다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고역에서 면제될 것이다. 지루한 회의 시간에 끝없이 계속되는 상사의 잔소리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상사의 울그락불그락 하는 표정을 느긋이 지켜보며 나는 스위치를 눌러 찰카닥, 귓꺼풀을 닫고 흐뭇한 미소를 띤다. 손으로 귀를 막을 필요도 없다. 얼마나 통쾌한가.

 

귓꺼풀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하느님의 실수였다. 아마 하느님도 인간이 이렇게까지 기계 문명을 일으키고 개미처럼 밀집해서 소란하게 살 거라고는 예상치 못하셨는가 보다. 인류 여명기의 원시인들에게는 캄캄한 밤중에도 귀는 열려 있어야 했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맹수의 발자국 소리를 감지하지 못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그래서 귓바퀴는 커져야 했고, 귓꺼풀은 있어서는 안 됐다. 하느님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밤낮없이 귀를 곤두세워 경계를 해야 하는 환경도 아니다. 대신 현대인은 너무 많은 소리로 둘러싸여 있다. 귓바퀴는 소용 없어졌고, 귓꺼풀이 필요해졌다. 자연은 소용없는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은 새롭게 만든다. 미래 인류에게는 귓바퀴는 사라지고 귓꺼풀은 새로 장착되리라. 진화는 아마도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한 하느님의 AS 과정인지 모른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선잠에서 깬 아침, 내 귓속에서 움트는 귓꺼풀의 여린 새싹 탓인지 자꾸 귀가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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