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7)

샌. 2021. 7. 21. 10:47

 

40년 전쯤 여름방학 때 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담삼봉으로 캠핑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학교에도 교복 자율화 등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 정권은 교과목 외에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했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G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은 내가 만난 교장 중 가장 특이하고 개성이 있었다. 고시 출신으로 문교부에서 행정 관료로 지내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상관과 의견 충돌로 좌천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고집 세고 자기 소신이 강했다.

 

학교 점검차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참관도 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사나 귀찮고 긴장이 된다. 맨손 수업을 하지 말라고 주의받는 것도 이때다. 그런데 G 교장은 있는 대로 보여주면 된다면서 평상시와 똑 같이 하라고 했다. 일과가 끝나면 장학사로부터 학교 평가 결과를 듣는 회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도 G 교장은 장학 업무를 똑바로 하라고 도리어 장학사에게 훈계를 했다. 장학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잔소리를 듣고 가야 했다. 교육청에서도 골치 아파했을 게 틀림없다.

 

학기별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어느 학교나 교사가 시험 문제를 출제하면 교무주임이 일괄 수합해서 교장 결재를 받는다. 그런데 G 교장은 교사가 개인별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결재를 받으라고 했다. G 교장은 꼼꼼하게 문제를 읽으면서 하나하나 체크했다. 한 사람이 결재받는 데 한 시간은 보통이고 두세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시험 때가 다가오면 교장실 앞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G 교장에게 한 번 밉보이면 고생이 심했다. H 선생은 교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쥐방울만 한 새끼, 한 번 뒤엎어버릴까 보다."

말로만 투덜거릴 뿐, 실제로 뒤엎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킥킥 댔다. 교사들의 불만이 커지니까 나중에는 문제지를 교과주임이 모아서 결재를 받는 걸로 대치되었다. 당시에 교과 중심의 학교 운영을 한 것은 G 교장의 선견지명이었다.

 

G 교장은 자신의 두뇌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그렇지 영민한 부분은 누구나 인정했다. 한 번은 각 과목별로 교육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예산은 자신이 책임지고 따온다고 했다.

 

과학과에서도 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생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교장이 나를 불렀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니까 교장이 제안을 했다. 학생들이 과학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실험실을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놀고 있는 실험실 벽에 과학관처럼 전시물을 설치해서 학생들이 만지고 놀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시작되고 전시물이 제작 설치되었다. 아마 학교 실험실로는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완성한 뒤에는 외부 손님을 모시고 시범 수업도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좋아했다. 그러나 뒷 관리가 문제였다. 거친 남자 중학생들 손에 제작물이 견뎌나질 않았다. 공사를 하면서 커미션으로 교장한테 얼마가 갔을 거라는 등 뒷말도 많았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난 해프닝이 되었다.

 

G 교장의 눈 밖에 나면 만회하기가 어려웠다. 반면에 한 번 믿으면 무한 신뢰를 했다. 교무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교장의 신임을 받는 소수의 측근 그룹과 불만이 많은 다수의 교사로 나누어졌다. G 교장은 자신의 경영 철학이 뚜렷했지만 교사들의 화합을 이끄는 덕은 부족했다.

 

전두환 정권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사제동행의 캠프 활동을 실시하라고 일선 학교에 지시했다. G 교장은 한 술 더 떠 담임 인솔하에 반 단위로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어 야외 활동을 자제하는 게 보통의 교장이다. 캠프도 학교 운동장에서 하는 등 형식적으로 때웠다. 그런데 G 교장은 반 별로 팀을 꾸려 전국으로 흩어져 경험을 쌓으라고 했다. 사고가 나면 자기가 책임을 지겠으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내 교직 생활에서 만난 교장 중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은 G 교장이 유일했다.

 

반 아이들의 신청을 받았더니 20명 정도가 모였다. 장소는 도담삼봉으로 정하고 3박 4일 동안 강변에서 캠핑할 계획을 짰다. 혼자로는 엄두가 안 나서 선배와 후배 교사에게 부탁을 해서 동행하기로 했다. 선배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내가 제일 따르던 선배였는데 뒷날 교장 승진을 앞두고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후배는 잠시 교직에 있다가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영재교육을 공부한 뒤 서울에서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아이들과의 강변 캠핑은 무난히 진행되었다.

 

지금 저 아이들은 50대가 되었다. 중학생 때 배낭 메고 갔던 여름 캠핑을 잊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단양역에서 내려 다시 시골버스로 도담삼봉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여 야영장을 만드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3박4일이였지만 실제로 강변에서 논 것은 이틀밖에 안 됐다. 지금 같았으면 버스를 대절해서 주변 관광도 하면서 훨씬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고생한 경험이 오래 남는다.

 

한여름이었지만 그때는 야영이나 레저 바람이 불기 전이라 강변은 조용했다. 깨끗한 모래사장도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낮에는 주로 물놀이를 하고 주변의 석문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텐트에서 자면서 직접 하는 취사를 재미있어했다. 대부분 캠핑이 첫 경험이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잘 적응하며 요령껏 해 냈다. 버너가 가끔 말썽을 부려 교사의 손길이 필요한 정도였다. 다행히 보이 스카우트 지도 경험이 있는 선배가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후배는 오락 담당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이끌었다.

 

아마 이 사진은 캠핑을 마치고 도담삼봉을 떠나며 찍은 듯싶다. 모든 것이 시절 인연이 아니던가. 만날 때가 되면 만나고, 헤어질 때가 되면 헤어진다. 물결이 모래사장을 쓸고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지만 이내 다음 물결에 의해 지워지듯 어쩌면 덧없어 보인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소멸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새겨진 인연의 흔적은 소중하게 남아 있으리라. 40년 전 여름의 도담삼봉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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