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1971년에 나왔으니 올해로 50년이 된다. '아침이슬'은 긴 세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곡 중 하나다. 반정부 집회에서 많이 불려진 탓인지 70년대 중반에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이 좋다.
'아침이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만난 후배 P 여선생이다. P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남달랐다. 다른 신임교사들은 일찍 나와 교무회의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P만 보이지 않았다. 교감이 신임교사 소개를 하려는 찰나 교무실 문이 꽈당 열리며 등산복에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P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의 첫날인데, 이런 파격이 없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지리산 등산을 갔다가 일정이 어긋나는 바람에 산행 복장 그대로 바로 학교로 나온 길이었다.
P는 독불장군식이어서 겉으로 보면 제멋대로 사는 건방진 젊은이로 보였다. 동료 선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같은 대학 출신 모임에는 빠지지 않았다. 술을 잘 마셨고, 담배도 거리낌없이 피웠다. 80년대만 해도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눈총을 받았다.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때 P는 술에 취하면 자주 '아침이슬'을 불렀다. 누가 듣던 말던 상관없었다. 분위기에 따라 '아침이슬'이 어떤 날은 행진곡풍으로 들리고, 어떤 날은 장송곡처럼 들렸다. 어쨌든 P가 '아침이슬'을 부르면 술판은 거의 파장으로 기울었다. 청승을 떤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신 학교에서 맡은 일은 똑 부러지게 잘 했다. 학급 관리나 수업이 나무랄 데가 없었고, 아이들한테서 인기도 최고였다. 교장이나 교감은 P의 처신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선생으로서의 역할에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체 회식자리에서 P가 당당하게 담배를 피워도 못 본 척했다. 아마 다른 교사 같았으면 빈축을 사고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P는 사람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한참 뒤의 노래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노래 가사가 꼭 P에게 들어맞았다. 나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이와 인생의 내공은 무관했다.
언젠가 퇴근길에 P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술 한 잔 어때요?" P가 일대일로 동료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무척 의외의 신청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거절했는지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약속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전에 한 번은 내가 들고 다니는 큰 가방을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선배님, 그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선배'라고 부르는 호칭은 친근함의 표시였다. 나는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대답했다. "카메라가 들어 있지. 하늘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언제라도 찍을 수 있도록." 그건 사실이었다. 그때는 구름에 빠져서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모양이 특이한 구름이 보이면 찍곤 했다. 그 말에 P의 표정이 환해졌다.
P는 대학생 때 학생 운동을 했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자세한 전력은 알 수 없었다. 궁금했지만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다. 정치가 화제에 오르면 시니컬한 미소만 지을 뿐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내가 그 학교를 떠난 뒤 간간이 P의 소식을 들었을 뿐 만나지는 못했다. 다른 일을 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 두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무척 재능 있고 똘똘했는데 시대와의 불화로 고민이 많았던 후배였다.
'아침이슬'이 나온지 50년이 되었고, P와의 짧은 인연도 40년 전의 일이다. '아침이슬' 하면 담배 연기 자욱한 술자리에서 P가 독백하듯 부르던 '아침이슬'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노래 속에 많은 사연이 담겨있으리라 우리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가늘고 큰 키에 눈이 유난히 컸던 내 기억 속의 P는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이젠 한탄하듯 '아침이슬'을 부르지 않아도 되었을까. 어디선가 '아침이슬'이 들리면 아스라이 소환되는 추억 속 옛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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