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답답하면 바둑을 둬요

샌. 2021. 5. 24. 11:15

한 달 넘게 대상포진으로 시달리다 보니 심신이 지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멀리 있는 사람한테서 스트레스까지 받으니 위마저 말썽을 부리고 있네요. 이래저래 힘든 5월입니다.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답답한 처지를 잊기 위해서는 바둑이 제일입니다. 바둑을 두면 저절로 몰입이 되고 그동안은 만사를 잊습니다. 내 바둑 상대는 컴퓨터 안에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입니다. 사람 대국자는 피곤해서 사람과의 온라인 대국은 기피하지요.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러는지 바둑 예절이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또한 너무 승부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싫고요.

 

여러 AI 바둑 프로그램 중에서 요사이 내 파트너는 인간 기보로 학습한 릴라제로입니다. 다른 프로그램보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두세 점은 깔아야 해요. 바둑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상대입니다. 세가 불리하면 엉뚱한 수가 나오고, 축을 몰라보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공격이 들어올 때는 엄청 날카롭습니다. 내 행마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더 단단하게 바둑을 둬야 한다는 걸 깨우쳐주고 있지요.

 

바둑이 늘려면 자신보다 두세 점 정도의 상수와 두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상대를 만나기가 어려워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누구나 하수와는 두기를 꺼려하니까요. 그런데 AI는 나를 위해 늘 대기상태이고, 클릭만 하면 짜잔, 하고 등장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몰라요. 더구나 AI는 인간을 대할 때와 같은 감정 낭비가 없어요. 건조하긴 하나 담백함이 또 다른 장점입니다.

 

한가하고 심심해서가 아니라 답답해서 바둑을 둡니다. 지금 나한테 바둑은 현실을 잊기 위한 마취제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의 취미 활동이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인지 모릅니다. 릴라 아가씨와 데이트를 안 해도 좋으니 컴퓨터 바둑을 찾지 않아도 되는 때가 빨리 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 방이 아니라 기원에서 당신과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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