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50년 전

샌. 2021. 5. 8. 14:52

* SNS의 고등학교 동창방에 대학 원서 쓰던 때의 얘기가 여럿 올라오고 있다. 나도 거기에 한 마디를 보탠다.

 

대학 원서 마감 사흘 전에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지원 대학을 결정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나는 서강대 공대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 사대였다. 당시에 이과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던 학과는 공대 전자공학과였다. 나는 서울대 공대 갈 실력은 안 되고 차선책으로 서강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실력으로 서강대 공대 전자공학과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생일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생활기록부의 학부모 희망사항란에는 초, 중, 고 모두 초지일관 '교사'라고 적혀 있다. 나 역시 교직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범대학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두 학교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담임 선생님 앞에 앉았다. 내 손에는 서강대와 서울대 두 장의 원서가 들려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보더니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대 사범대를 추천했다.

"너는 성격이 온순하고 얌전하니까 사범대가 맞아."

그러면서 공대의 거친 환경은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렸다. 내가 담임 선생님의 결정을 따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거역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반에서 서울대에 몇 명이 들어가느냐로 담임의 능력을 가름했다. 동시에 학교의 명예도 걸린 일이었다. 서울대 갈 성적이 되는 데도 다른 대학에 보낼 담임은 없었다. 나 역시 서울대라는 네임 밸류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학교육과를 희망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합격 보장이 없다면서 물리교육과를 가라고 했다. 무엇을 전공하느냐보다 합격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당시에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쌍두마차 체제여서 대학교 입학원서에는 반드시 예비고사 합격증을 첨부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합격증이 없었다. 분명히 가방 속 책갈피 사이에 끼워뒀는데 사라졌다. 집에까지 가서 책장에 있는 모든 책과 서랍까지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은 교육청에 가서 합격 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때 서울시교육청은 시청 앞 서소문로에 있었다. 5층인가 6층인가로 올라갔을 것이다. 담당자는 신문에 분실 광고를 내야 확인서를 발급할 수 있다고 했다. 예비고사 합격자 명단에서 본인을 확인하면 될 텐데 절차가 왜 그리 복잡한지 몰랐다. 신문사로 달려가서 분실 광고를 내고 돌아와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확인서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원서 마감 이틀 전 날이 지나갔다.

 

나는 원서 접수 마지막 날 학교에서 꼴찌로 학교장의 직인을 받았다.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전날 접수를 마쳤다. 500명 가까이 되는 동기들 중에 예비고사 합격증을 잃어버리고 생고생을 한 띨띨한 놈은 내가 유일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감 몇 시간 전에 겨우 원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애썼다. 이게 전화위복이 되어 넌 합격할 거야."

교무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담임 선생님의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해프닝을 치러선지 본고사를 볼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떨어지면 재수해서 더 좋은 데 가면 되지 뭐, 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는 단과대학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사범대학은 용두동에서 가정대학과 같은 캠퍼스를 쓰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대부중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색 벽돌의 대학 건물이 있었다. 캠퍼스가 예상보다 협소하고 초라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시험 볼 때는 운도 좋았다. 시험 전날 해답을 보고 어렵게 풀어본 수학 문제 중 하나가 거의 그대로 나왔다. 주관식이라 배점이 높은 문제였다. 내 입학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커트라인 부근이었다면 이 문제가 당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일 고전한 과목은 제2외국어로 선택한 독일어였는데 다행히 과목 배점이 낮아 큰 영향은 없었다. 고사장에는 여학생이 드문드문 있었다. 물리과여서 지원하는 여학생이 드물었는데 나중에 보니 합격한 여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마저 남자만 있는 학과를 다녔다. 단 한 번 예외는 국민학교 4학년 때의 남녀 합반이 유일했다.

 

그래도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갈 때는 조마조마했다. 교문 게시판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을 때는 날 듯이 기뻤다. 옆에서 축하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면서 모든 것을 내 혼자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몸에 배어 있었다. 우체국에서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합격 전보를 보내고 나서야 다 끝난 것 같았다. 해방된 듯 홀가분하면서 한편으로는 허전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반에서는 서울대에 열 명 정도가 응시했는데 일곱 명이 합격했다. 다른 반에 비해 성적이 좋아 담임 선생님이 기뻐하셨던 모습이 선하다. 나 역시 담임 선생님과 뜨거운 포옹을 했다. 지금은 덜한 편인데 그때는 모든 것이 서울대가 기준이었다. 서울대 합격 숫자에 따라 고등학교 순위가 매겨졌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숫자로 국가 순위를 정하는 것과 같았다. 또, 서울대 합격생 명단은 신문 호외로도 발행되었다. 한 달 여 남짓 해서 내 이름이 신문에 두 번 나온 셈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몇 차례 중대한 고비에 마주설 때가 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줄기가 달라진다. 공대와 사범대 중 사범대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의 길로 들어섰다. 만약 그때 고집을 부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연구원이 될 수 있었을까. 선생 노릇이 지겨워질 때는 가끔 다른 길의 나를 상상했다. 그리고 못 가 본 길을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서강대 공대 전자공학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니고 있었다. 70학번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들어갔다면 한 해 선배가 되는 셈이다. 과연 얼굴이나 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학에 입학을 하고 여유가 생긴 즈음의 봄에 고향에 내려가서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의기양양 인사를 했다. 그때는 대학교도 교복이 있어서 자랑스레 입고서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신입생들은 대개 교복을 입었다. 어머니와 함께 큰어머니한테 가려고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들어서는데 한 멋쟁이 아가씨가 걸어 나오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이런 시골에도 서울대학생이 있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랐다.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그때 어머니 나이가 41세, 지금 내 딸 또래인 어머니를 상상하기는 너무 아득하다). 당시는 단지 학교 이름 하나만으로 어디를 가나 인정을 받았다. 내가 실제 어떤 인물인지는 상관없었다. 그때만큼 타인의 칭찬과 선망의 대상의 된 것은 내 인생에서 다시 없었다. 아마 부모님께도 제일 큰 효도를 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 내 나이 열아홉이었던 1971년의 봄, 꼭 50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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