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대상포진이어서 다행이다

샌. 2021. 4. 21. 10:21

첫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했다. 어제 밖에서 마신 술 탓이라 여겼다. 당구를 치고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약간의 취기가 있었을 뿐 과하지는 않았다. 제일 먼저 코로나가 걱정되었다. 집에 손주도 와 있었다. 만약 코로나라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다. 

 

둘째 날

머리 띵한 정도는 더 심해졌다. 얼굴 왼쪽 부분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얼굴로 자꾸 손이 갔다. 흔한 감기 몸살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중풍의 전조증상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중풍이 오면 몸의 반쪽이 마비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보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다행히 손주는 오전에 떠났다. 다시 타이레놀과 쌍화탕을 먹었다.

 

셋째 날

여전히 머리가 띵하게 아프고 얼굴 왼쪽 감각이 기분 나쁠 정도로 비정상이었다. 그렇다고 견디지 못할 만큼 심한 것은 아니었다. 열이 동반하지 않는 걸 보아 코로나가 아닌 건 확실했다. 다행이라 여기며 좀 더 관찰해 보기로 했다. 아내는 병원에 가자고 하는데 이런 걸로 병원에 간들 뾰족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것저것 검사받느라 고생만 할 게 뻔했다.

 

넷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에 붉은 반점이 여럿 나타났다. 왼쪽 눈 밑에서부터 코 옆과 아래로 굵은 줄의 띠가 생겨났다. 눈 밑에 있는 반점에는 좁쌀 같은 하얀 돌기도 보였다. 만지면 아팠다. 번뜩 대상포진이라는 병명이 떠올랐다. 그동안 들은 풍월은 많았기 때문이다. 대상포진으로 고생했던 친구에게 전화해서 증상을 말했더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했다. 늦어질수록 고생한다고. 동네 피부과에서 예상대로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면역이 떨어져서 그러니 푹 쉬라고 했다. 얼굴과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연고와 약을 타 왔다. 병명이 확연해지니 마음은 개운했다.

 

다섯째 날(오늘)

우선 머리가 안 아프니 살 것 같다. 얼굴의 반점은 가끔 따끔거린다. 어제보다도 물집은 더 커졌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데 나는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아닌 게 고맙다. 대상포진은 나 혼자만 아프면 되지만, 코로나는 나와 접촉했던 많은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면서 고맙게 생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 대상포진의 '대상(帶狀)'이 '띠 모양'의 뜻이란 걸 이번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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