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시인의 사랑

샌. 2021. 4. 19. 12:41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틀째 이어진다. 미열도 있다. 그저께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 서울에 다녀온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소주 한 병이 좀 과했던 게 아닌가도 여겨진다. 때가 때인지라 혹 코로나가 아닌가 은근슬쩍 걱정도 된다.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슈만의 연가곡인 '시인의 사랑'이 흘러나온다. 문득 50여 년 전의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은 성악가였는데 특이한 면이 있었다. 외모는 레슬러처럼 우락부락했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면서도 괴팍한 면이 있었다. 좋게 보면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목소리가 엄청 컸는데 한 번 화를 내면 천둥 백 개가 몰아치는 듯 했다.

 

이 음악 선생님이 음반을 냈는데 타이틀이 바로 '시인의 사랑'이었다. 슈만은 어렵게 클라라와 결혼한 뒤 제일 행복했던 시기에 하이네의 시에 음률을 붙여 16곡으로 된 '시인의 사랑'을 만들었다. 슈만의 가곡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당시에 음악 선생님이 낸 '시인의 사랑'은 독일어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노래한 최초의 음반이었다. 독일어 번역은 같은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60년대 클래식 시장 수요는 뻔했을 것이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성악가가 낸 서양 가곡 음반이 몇 개나 나갈 수 있겠는가. 수업 시간에 음악 선생님은 우리한테 음반을 사라고 엄청 광고를 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음악 실기 시험 점수에도 반영한다고 엄포를 놨던 것 같다. 그래서 자취방에서 생활하던 가난한 시골 촌놈인 나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음반은 이삿짐 속에서 몇 년을 따라다니다가 결국 한 번도 틀어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음악 선생님은 그 뒤에 시민회관인가 어딘가에서 독창회도 열었다. 공연 티켓 역시 학생들에게 팔았는데 예능 쪽에 관심 있던 아이들은 직접 시민회관에 가기도 했다. 강매한다고 아이들이 불평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는 좁았고, 수입도 빈약했을 터였다. 아마 음악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호구지책으로 교사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밖에 음악 시간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이 남아 있다. 선생님은 유독 발성법을 강조했다. 수업을 시작하면 선생님이 만족할 때까지 발성 연습을 했다. "아 에 이 오 우"를 오래 반복했다. 마음에 안 들면 "가 게 기 고 구"부터 "하 헤 히 호 후"까지 한 바퀴를 돌렸다. 또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한 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소리는 못 내면서 입은 찢어지게 벌리는 시늉을 했다. 나에게 음악 시간은 복화술 시간과 비슷했다.

 

음악 실기 시험은 한 사람씩 나가 지정곡을 불러야 했다. 노래 못 하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첫 음정을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땡"이었다. 한 반에서 절반 정도는 이삼 초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했다. 음치인 나는 거기에 덤으로 묻혔다. 땡 없이 얼마나 노래를 길게 하느냐가 받는 점수였는데, 노래 전 곡을 부를 수 있는 학생은 서넛밖에 안 되었다. 우리를 괴롭힌 노래는 "성문 밖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하는 슈베르트의 '보리수'였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음악과 미술 시간이 없어졌다. 나는 음악과 미술이 없는 시간표를 보고 환호했다. 나에게는 체육까지 포함한 예체능 과목은 늘 모자라고 뒤처졌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만큼 고역은 없다. 뒷날에는 반대 입장이 되어 내가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괴롭히는 선생이 되었다. 학창 시절의 절박했던 경험도 별로 반면교사가 되지 못했다.

 

음악과는 거리가 먼데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인의 사랑'에 옛 추억이 소환되는 게 신기하다. 그것도 50년 전의 옛일이다. 어떤 기억은 손으로 잡을 듯 가까운데 어느덧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친구 중 연락이 되고 만나는 사람은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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