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랑탕 렌선 트레킹(7)

샌. 2021. 4. 3. 18:40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랑시샤카르카를 다녀오는 날이다. 랑시샤카르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랑시샤카르카의 고도는 4,160m로 우리가 묵고 있는 캰진곰파와 비슷해서 오르내림이 없는 평지를 걷지만 왕복 24km로 길다. 평지라도 고도 4천 미터급에서 하루에 24km를 걷는다는 것은 만만치 않다.

 

다행히 새벽에 눈을 뜨니 몸이 개운하다. 어제 오후에 꿀맛 같은 휴식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른 롯지로 이동이 없으니 포터는 짐에서 해방이다. 포터의 휴식일인 줄 알았더니 우리 배낭을 메고 우리와 1:1로 동행한다. 귀족 트레킹을 하는 기분이다.

 

출발하기 전 서쪽 하늘에 달이 떠 있고, 랑탕2봉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다.
랑시샤카르카로 출발하는 모습

 

배낭도 없이 걸으니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다. 처음으로 선두에 서서 신나게 걷는다. 앞선 사람, 뒤처진 사람으로 긴 행렬이 만들어진다. 앞에서 뒤를 바라보니 뿌듯하다. 선두에서 앞서 걷는 재미가 이런 건가 싶다.

 

옆에서 같이 걷는 포터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What’s your name?”

“Shanny.”

“How old are you?”

“twenty-eight.”

“Are you married?”

“Yes, I have a daughter.”

 

영어로 중얼거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그 이상은 대화가 안 된다. 뭐라고 해도, 뭐라고 하는데도, 도무지 서로가 못 알아듣는다. 같이 걷지만 벙어리나 다름이 없다.

 

한참 가다가 샤니(생김새는 우락부락한데 이름은 곱다)가 내 나이를 묻는다. 나는 반올림을 해서 “sixty”라고 대답했더니 깜짝 놀란다. 그러면서 “Strong man!”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와우!”, 내가 강한 남자라는 칭찬을 들을 줄이야. 그것도 네팔 청년한테서. 없던 기운이 저절로 솟는다.

 

포터 Shanny와 함께

 

랑시샤카르카는 말할 나위도 없고 오가는 길이 정말 절경이다. 한국에도 멋진 산이 많은데 왜 돈을 들여서 히말라야까지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이곳을 보여준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산이라고 다 같은 산이 아니고,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풍경 1
풍경 2

 

만년설이 덮인 히말라야 설산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다. 그 앞에 서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장엄이라고 할까, 아니면 종교적 신비라고 할까,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웅장한 풍경 속에 깃든 어떤 영적 에너지는 히말라야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히말라야를 찾는 이유가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오늘 길은 설산의 속살로 우리를 깊숙이 인도한다.

 

캰진곰파 전과 후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랑탕 트레킹의 진수는 랑시샤카르카 가는 길이다. 나무나 풀이 거의 없는 황량한 풍경이 이 세상 무엇보다 다채롭고 황홀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반환점인 랑시샤카르카는 긴 과정에서 절정의 순간이다. 샤브루벤시에서 여기까지 온 노고는 오늘의 눈호강으로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9시간이나 걷느라 일행은 힘들고 피곤해하는데 어째선지 나는 예외다. 잘 먹고 잘 걷는 날 보고 고소 체질이라며 부러워한다. 아침 식사로 계란볶음밥이 나왔는데 접시를 비운 건 나 혼자였다. 포장된 비빔밥에 물을 넣어 먹는 점심도 나는 거뜬히 비운다. 일행 중에는 전혀 손을 못 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매번 그러하다면 오죽 좋으랴. 전체 일정 중에서 이날만 특별했으니, 랑시샤카르카는 나와 영혼의 주파수가 잘 맞는 장소인 것 같다. 이 정도의 자뻑은 히말라야 신령님도 귀엽게 봐 주시리라.

 

풍경 3
풍경 4
길 끝에서 풍경에 흠뻑 젖은 트레커

 

돌아오는 길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전과 오후의 햇살 각도가 달라지니 같은 풍경이 주는 느낌도 다르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선두에서 계속 걷는다. 마치 햇살 좋은 봄날에 들판으로 소풍 나온 기분이다. 전체 랑탕 트레킹에서 나에게는 이 길이 제일 아름답고 평화롭고 넉넉하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먹다.
풍경 5

 

히말라야에서는 낮은 기압 탓에 밀폐된 모든 것이 팽창한다. 3천 미터만 지나도 라면 봉지가 팽팽해진다. 사람 얼굴도 탱탱해진다. 우리는 보름달처럼 동글동글해진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웃는다. 여자들은 주름이 없어져서 좋다고 즐거워한다. 내 네모난 얼굴이 효모 넣은 빵처럼 부풀어 올랐나 보다. 누군가가 찐빵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 눈썰미가 날카롭다. 사실 중학생 때 내 별명이 찐빵이었으니까.

 

붉게 물든 산봉우리

 

캰진곰파에 돌아오니 건너편 산봉우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 후에 내일 일정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갖다. 원래는 4,984m의 체르고리를 오를 예정이었으나 모두 지쳐 있어 4,620m의 키모슝리로 바꾸자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견은 체르고리로 모아지다. 그런데 단장이 가이드와 상의하는 과정에서 결국 키모슝리로 결정되다. 현재 우리 체력으로 체르고리에 는 서너 명 정도밖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가이드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내일 일정을 논의하는 전체 모임

밤이 되니 오슬오슬 춥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오늘 히말라야 속에서 너무 까분 건 아닌지 은근히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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