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을 맞이한 지 50일이 지났다. 이제야 종착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얼굴에 난 포진은 3주 정도 지나니 아물었지만 가려움증의 여진은 계속이다. 개미 한 마리가 멋대로 내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다. 대상포진은 뒤끝이 사나운 질병이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끈질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내 발로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요."
(젊은 의사는 "노화 탓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늙어서 그래요. 시간이 약이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세요.")
서운했으나 의사 말이 틀리지 않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년이 되니 이상이 생긴 뒤의 회복 기간이 길어진다.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탄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놀다가 다쳐서 손가락에 피가 나면 흙을 상처에 뿌렸다. 피와 흙이 엉겨 붙었다가 떨어지면 금방 말끔해졌다. 생명 유지의 면역력이 그만큼 왕성했다는 뜻이다. 지금 만약 그랬다가는 염증으로 엄청 고생할 것이다. 작은 생채기조차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해도 며칠을 간다. 어쩔 수 없는 노화 현상이다.
산다는 건 포탄이 작열하는 전장터를 누비는 것과 같지 않을까.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누구는 한순간에 비명횡사하고, 누구는 파편에 맞아 고통으로 신음한다. 요리조리 피해서 전진하는 운이 좋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른다. 사고든 질병이든 인생의 많은 부분이 운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아인슈타인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론에서 신은 아인슈타인의 단언과 달리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결정'이나 '확정'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운명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개구쟁이 소년이 특정 개구리를 겨냥하고 돌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불운이 닥치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고 이유를 찾는다. 행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다 내가 잘 나서다. 그러나 불운은 반드시 외부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자기 책임을 면하려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재일 것이다. 하찮은 대상포진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일 적당한 희생양이 바로 '운'이 아닌가 싶다. 늙을수록 필연보다는 우연 쪽으로 기우는 나를 본다. 그게 우주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면 점점 지혜로워지고 있다고 낙관해도 될 것인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횡설수설하며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이 있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사실이다. 세월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무너져 간다. 익어간다느니, 원숙해진다느니는 다 개소리다. 우리는 그저 늙어갈 뿐이다. 어디 의사의 말만이겠는가. "늙어서 그래요"는 모든 경우에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