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한 부모를 실버타운에 모신 뒤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2016~2018)의 기록이다.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가 부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면서 구술생애사 작가면서 딸인 최현숙씨가 썼다.
<작별 일기>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이며/특수한 과정이 애틋하면서 또한 담담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작가를 포함한 남매들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 집 남매들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정성은 각별하다.
지은이는 2008년부터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맡아왔다. 그 경험이 본인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가난한 노인과 부자 노인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다른지 더 생생하게 느꼈으리라 본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죽음 앞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많은 노인의 죽음을 보며 지은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한 것 같다. 지은이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직접 글에서 인용한다.
"나는 비참하고 슬픈 이미지로 쓰이는 '자살'이라는 단어보다, 결단의 의미를 담은 '자결'이라는 말을 쓰려 한다. 물론 그 노인의 마음을 내 나름대로 상상해서 쓰는 말이다. 삶의 존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로 극빈 노인의 자결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죽음 곁에 다다른 노인이라면 빈부를 떠나 같은 심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 살아야 하는가?'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철학적인 질문이자 과제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과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수긍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적 쓸모'를 장차 내 자발적 죽음의 가장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라면 사회적 쓸모의 한계점에서 자결을 선택하느냐 자연사를 기다리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 '한계점' 이후의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쓸모'란 것의 구체적 내역에 대해서는 나도 살아가면서 판단할 것이다. 그 판단력이 늘 살아있기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작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더 진지해지는 것을 말한다."
"늙어 죽어감에 관한 내 기획은 '적당한 때 알아서 죽기', 즉 자유 죽음이다. 인생 막바지를 그리 작정하고 나니, 남은 삶에 대해 계획이 선다. 순전히 개인적으로라면 안락사니 존엄사니 하는 말들이 좀 간지럽다. 빈곤한 노인들 입장에서라면 배부른 소리다. 안락사를 위해 외국을 찾는 노인에 대해 내가 돌보던 한 가난한 노인은 이렇게 일갈했다. "돈 갖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좋은 데 쓰고 앉은 자리에서 죽으면 될 일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내 심정도 비슷하다."
"사실 나는 죽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공감도 하고 동의도 되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라는 질문에 타인으로서 대체 어떤 답이 가능할까. 자식인 나를 위해 살아 있어 달라고? 그건 지독히 이기적인 답이며 내 마음 역시 그렇지 않다. 나는 엄마 없이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엄마에게는 미처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엄마와 같은 단계에 이르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집어 들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내 결단과 상관없이 살아 있는 엄마를, 살아 있는 모두를 존중한다."
지은이가 초지일관 말하는 것은 자발적인 죽음의 선택이다. 나도 지은이의 주장에 동감한다. 여러 표현 중에서 '자유 죽음'이라는 말이 제일 와 닿는다. 하지만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지은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련만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결단을 하더라도 제일 난감한 문제가 그 방법인 것을.
또 하나, 이 집 남매들 간 우애는 시기가 날 정도로 부러웠다. 부모를 모시는 데 다섯 남매가 어쩜 이렇게 일심동체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지은이는 무엇이 남매간 화해에 기여했는지 솔직하게 말한다. 장남인 오빠의 솔선수범과 돈의 힘이라고. 그러함에도 형제 사이에 어긋나는 집이 많은 게 현실인데 정말 이 집은 특별하다. 동시에 지은이는 빈부차로 생기는 불공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직시한다.
"엄마와 아버지가 늙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남매들과 그 배우자들 사이의 화기애애함은 상당 부분 돈의 덕이다. 이 상황에 대해 나는 내부자로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외부자로서 공분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나로서는 분열적이지만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자 한다. 자타의 늙어 죽어감의 구조적 차이와 불공정에 대해, 어떤 태도와 선택이 공정을 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한다."
지은이의 부모가 거주한 실버타운은 두 노인이 한 달에 내는 비용이 600여만 원이라고 한다. 병원비나 기타 비용을 제외하고도 6년간 5억 가까이 든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상류층이 아니면 거들떠 볼 수도 없는 곳이다. 지은이는 "과연?"이라는 의문 부호를 잊지 않는다.
"평생 고생하고 모은(사유화란 게 본디 불공정한 일이긴 하지만 내 부모나 남매들의 부가 적어도 부정부패한 착복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돈을 초고령 노후의 삶을 연장하는 비용으로 지불하는 부자 노인과 그 자식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돈 많아 봤자 별거 없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 초고령 노후의 삶(어느 단계 이후로는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아깝다. '저 돈을 다른 곳에 쓴다면 얼마나 마디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신체와 정신 건강의 해체가 어느 선을 넘어 버리면, 돈이 제값을 하지 못한다. 노인 시설이든 의료 시설이든, 노인 당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서비스 내용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줄어든다. 실버타운 안의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식사조차 불가능해진다. 이 단계에서는 부모를 직접 모시지 못하는 자식들의 소위 '죗값'으로, 그들이 물려받을 유산은 감소하고 부자 노인들을 소비자로 하는 실버산업과 의료 산업의 이익은 더 빠르게 증가한다."
<작별 일기>는 죽음으로 향해 가는 부모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면서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철학적 문제도 짚고 있다. 속 깊은 지은이가 앞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 책도 내줬으면 좋겠다. 책의 끝에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돈이 없고 남매간 우애가 없어 많이 지쳐 있을 당신에게, 외람되지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고 말하고 싶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의 죽음과 우리들의 죽음 사이에서, 변화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고 제안한다. 가족에게만 혹은 가족 중 누구에게만, 특히 대체로 여성에게만 노인 돌봄이 떠맡겨지지 않는 사회, 늙음과 죽음이 돈으로만 거래되지 않는 사회, 돌봄 노동이 가장 싼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