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푸르른 틈새

샌. 2021. 10. 29. 11:37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로 1996년에 발표한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작가의 10대, 20대, 30대의 삶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어느 작가나 첫 작품은 이야기 전개나 구성이 미흡할지라도 풋풋한 느낌이 들어 좋다. 더구나 성장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젊은 시절로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나게 된다.

 

<푸르른 틈새>에서 작가는 손미옥으로 나온다. 서른한 살의 미옥은 눅눅한 단칸 지하방에서 이사를 가려고 한다. 이사는 한 삶의 종착이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사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소녀와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교대로 나오면서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으며 커간다. 얼마나 아프게 앓았느냐에 따라 성장의 깊이도 달라진다. 사랑과 실연, 죽음, 이별에 따르는 슬픔과 고통은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지나고 보면 알게 되고 세월이 흘러야 전체가 조감된다. 한 개인의 경험은 특수하면서 또한 보편적이다. 어떤 성장소설이라도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닿아 있기 마련이다.

 

대학생이 된 미옥은 80년대의 정치 현실을 마주한다. 그때의 대학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나와는 10년 이상의 차이가 나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주인공만 다른 군부독재 시대였다. 미옥은 거리낌 없이 운동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 고등학생에서 갑자기 대학생이 되었을 때 충격파를 작가는 정치와 성으로 설명한다. 

 

"대학 풋내기 시절 내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한시바삐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내 수련과정에 필요한 것은 '정치용어사전'과 '성용어사전'이었다. 두 사전이 없으면 대학사회에서 운영되는 소통체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어릴 때 같이 살던 외가쪽 친척들 이야기, 사춘기 시절 등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 있다. 낯선 세상에 거침없이 부딪쳐 나아가는 미옥의 태도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애증으로 얽힌 아버지를 보내며 미옥은 한 세계가 끝났음을 인지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각각의 사건이 나를 과거로 자꾸 밀어내는 것을 경험한다. 성장소설은 추억을 소환하며 내 푸르른 틈새를 찾아보게 한다. 그것이 성장소설을 읽는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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