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아직 멀었다는 말

샌. 2021. 10. 20. 12:04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모르는 영역' 등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 작가의 글을 읽으면 사람살이의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책의 단편들도 모두 그런 범주에 들어 있다.

 

작가는 아프지만 세상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폭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가련하고 쓸쓸한 존재들이다. 누구는 아빠 찬스로 50억을 받고 떵떵거리는데, 다른 누구는 노동 현장에서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 세상은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그런 점이 이 단편집의 제목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손톱'이라는 소설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스쳐가듯 나온다. 소희는 엄마와 언니가 집을 나가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녀다. 손톱을 다쳐 빠지게 되었는데도 치료비가 아까워 병원에 가지 못한다. 휴대전화 AS 센터 대기실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고 잡지를 보던 소희는 옆자리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아직 멀었다 소희야" 라는 말로 알아듣는다. 세상살이가 고달파도 살아가야 할 여정이 길다는 슬픈 운명을 가리키는 의미 같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나오는 소설 중에서 '너머'는 학교 현장이 배경이다. 주인공인 N은 두 달간 기간제교사로 일하며 요양병원에 입원중인 어머니를 간호한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N에게는 늘 병원비가 걱정이다. 기간제가 끝나면 다시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학교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코미디 같은 갈등이 벌어진다. 삭막하긴 요양병원도 마찬가지다. 선한 제도는 선한 인간을 만들고, 악한 제도는 악한 인간을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잔인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는 얼마나 힘이 들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없이는 이런 글을 쓰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작가의 소설에는 인간의 고통, 아픔, 절망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살아내는 일은 숭고하다.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없다. 한숨을 내쉬며 책을 무겁게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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