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어떤 실수

샌. 2020. 12. 15. 12:10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크기다. 돋보기가 아니면 읽을 수가 없다. 아내는 그러려니 하고 나에게 주었을 것이고, 나 역시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다. 우리 같은 노인은 헷갈리기 십상이다. 보습제와 바디와셔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지, 상표명은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의미도 없다. 제조사에서는 실용적인 면에서도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바르는 거여서 다행이지 만약 주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더 큰 사달이 벌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노인만 사는 집에서는 엉뚱한 걸 음식에 넣어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먹는 약의 종류가 많을 때는 자녀들이 세심히 살펴드려야 한다. 아직 6학년인 나도 보습제와 바디와셔를 구분 못 하는 데 더 나이 들면 오죽하랴 싶다.

 

나도 이제 누구나 가야 하는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섰다. 앞으로 점점 이런 경험이 잦을 테고,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할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노라면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장수한다는 건 정신의 총기가 도망가는 걸 직접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젊었을 때 제 잘난 척했던 응보인지도 모른다.

 

보습제와 바디와셔도 구분 못 하고 보름 넘게 사용하다니, 예전 같으면 진즉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늙으면 반응이 둔해진다. 아무리 발버둥 친들 안 되는 걸 어떡하랴. 이 한심한 놈, 하고 탓하기 전에 다음에는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게 차라리 정신 건강에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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