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내 어릴 적 겨울에는

샌. 2021. 1. 3. 19:35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만 봐도 노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세 집은 3, 40대 부부 가정이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도 여섯 명이나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 보기는 힘들다. 등교할 때 잠깐 북적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제일 넓은 공터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운동하기 위해 나온 어른들이 많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주를 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친구와 노는 시간은 태권도학원에 나가서다. 요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틀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보면 붕어빵이 찍혀 나오듯 주형대로 빚어내는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옛날 우리가 클 때는 야생마와 비슷했다. 부모는 밥만 먹이면 되었고 나머지는 온전히 아이들의 시간이었다. 인간이 만든 규격화된 놀이터가 아니라 자연이 놀이마당이었다. 컴퓨터, 게임기, 로봇도 없었다. 옛날 아이들은 뭘 가지고 놀았을까, 너무 단조롭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겨울철에는 주로 산을 쏘다니거나 썰매를 타고 놀았다. 고향 동네 뒤는 야트막한 산이고, 앞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동네 주변이 전부 우리의 놀이터였다. 겨울이 되면 물이 채워진 논에는 얼음이 꽁꽁 얼었다. 동네 남자 아이들은 거기에 다 모였다. 각자 만든 썰매를 갖고 나와 신나게 얼음지치기를 했다. 두 편으로 나누어 썰매 싸움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따뜻해진 날씨가 이어지면 얼음이 녹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생겼다. 그러면 얼음도 고무판처럼 물렁물렁해졌다. 썰매타기는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장애물 경주하듯 구멍을 타고 넘다가 물에 빠지기도 했다. 물에 빠진 아이들은 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면서 깔깔거렸다. 아이들 몸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썰매를 만드는 것도 상당한 창의성과 손재주가 필요했다. 잘 만든 썰매는 모두의 찬탄을 받았다. 나는 손재주가 워낙 없어서 썰매를 제대로 만들어 본 기억이 없다. 옆집 동무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버린 썰매를 고쳐서 쓰곤 했다. 빨리 달리기 시합을 하면 나는 늘 꼴찌였다.

 

썰매만 탄 것이 아니라 다른 놀거리도 엄청 많았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하루해가 짧을 수밖에 없었다.

 

구슬치기, 숨바꼭질, 말뚝박기, 딱지치기, 팽이치기, 땅따먹기, 자치기, 굴렁쇠굴리기, 오방놀이, 제기차기, 낙지가이상, 전쟁놀이, 돼지오줌보축구,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소꿉놀이, 실뜨기) 등등.

 

겨울이면 농한기라 부모 일손을 도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놀기만 했지 공부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공부 스트레스는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갔지만 시골 마을에서 좋은 학교 입학에 신경을 쓰는 집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를 가겠다고 떼를 쓰면 부모에게는 걱정거리였다. 입학금이나 공납금 마련하자면 빚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돌아가며 동무 집에 모였다. 그 집 엄마는 아이들 저녁 식사를 준비해 줬다. 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정도였지만 꿀맛이었다. 동무들과 함께 먹는 밥맛은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밥을 먹고 나서는 호롱불 아래서 화투를 쳤다. 그때는 어른들의 유일한 오락도 화투였다. 우리는 주로 뻥이란 걸 했다. 또 손뼉 박자를 맞추며 이름 부르기를 하는 '아이젠그라운드'라는 놀이도 인기가 있었다. 좁은 방에서 베개 싸움도 자주 했다. 실컷 놀다가 밖에 나서면 겨울 별자리가 총총했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우리가 크던 시절과는 다르다. 두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아이들이 많이 있지만 아이들을 보기 힘든 아파트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감회에 젖는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대신 개 짖는 소리만 가끔 요란하다. 주인 따라 나온 조그만 애완견이지만 소리는 왜 그리 앙칼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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