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조심과 방심 사이

샌. 2022. 5. 13. 10:15

발바닥에 이상이 느껴진 게 3년 전이었다. 많이 걸으면 따끔거리며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심하지는 않으니 우선 걷는 걸 자제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긴 거리의 트레킹이나 등산을 쉬게 되었고, 집에서는 쿠션이 넉넉한 슬리퍼를 신었다. 조신하고 몇 달을 보냈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작년까지 집 부근에 있는 낮은 산에만 드문드문 다녔지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았다. 제일 높이 올랐던 게 600m급의 파주에 있는 감악산이었다. 그 정도면 거뜬해서 발은 다 나았다고 판단하고 몇 달 전부터 등산을 재개했다. 아직 높은 산은 아니지만 - 발보다도 이제는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어 -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올랐다. 산에 드는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북한산 숨은벽에 다녀왔는데 다시 왼쪽 발바닥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약하지만 찌릿찌릿한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근육 염증이 나은 게 아니라 잠복하고 있었던 뜻인가. 무리하면 언제든 다시 발현한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나이로는 나는 이미 한참 전에 공식적인 노년에 들었다. 신체나 정신 기능이 쇠퇴하는 것은 필연지사다.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수시로 한다. 아직 산티아고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십 년 전에 계획하던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우선 배낭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전 일정 동안 배낭을 배달해주는 혜초여행사 상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발바닥이 이렇다면 다 글러버린 일이다.

 

걷고 싶은 데가 있는데 하체가 부실해서 가지를 못한다면 늙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 나는 발과 눈을 내 노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다리가 시원찮아서 가고 싶은 데를 못 가고, 눈이 흐릿해져서 책을 보는데 지장을 받는다면 세상 사는 맛의 팔구할은 달아나 버릴 것 같아서다. 그렇게 되면 나이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겠다.

 

얼마 전에 소식을 듣게 된 중학교 동기가 있다. 지금 남파랑길을 스무날째 걷고 있는 중이었다. 작년 봄에는 해파랑길을 40일간 연속으로 걷고, 가을에는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고 한다. 올 가을에는 다시 산티아고 북부길을 계획중이라고 말했다. 널 따라가고 싶다는 말은 했지만 이젠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가는 탈이 나고야 말 것이다. 반면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50m만 걸어도 쉬어야 하는 친구도 있다. 걷는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그 친구를 보면 잘 걷지 못한다고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동물이다. 걷는 걸 포기한 대신 삶의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다.

 

다시 발이 살살 신경을 쓰이게 한다. 지금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병원에 간다고 제대로 진단해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조심만 하면서 지낼 수도 없다. 당분간은 적당히 무시하고 산행을 이어보려 한다. 조심(操心)과 방심(放心)의 중간 어디쯤에 마음을 두면서.

 

나도 좀 신경써 달라고 발이 사인을 보내는 것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발만큼 고생하는 신체 부위도 없는 것 같다. 답답한 신발에 갇힌 채 60kg이 넘는 몸뚱이를 지탱하면서 짓눌려 사는 발이 아닌가. 발바닥을 마사지하며 나는 염치없이 부탁한다. "발아,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 이 몸뚱이를 이곳저곳 실어나르느라 얼마나 애썼니. 이제야 네 비명을 듣는다. 하지만 좀 더 버텨줄 수 없겠니. 아직은 걸어보고 싶은 길이 많단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 사는 곳인데  (0) 2022.06.04
남들처럼  (0) 2022.05.30
어제 꾼 꿈  (0) 2022.05.05
한 장의 사진(33)  (0) 2022.04.24
한 장의 사진(32)  (2) 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