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33)

샌. 2022. 4. 24. 11:01

 

대학생 때 사진이 별로 없다. 앨범에서 스캔해 둔 파일이 열 장이 채 안 된다. 그마저 앨범은 없어지고 해상도 낮은 파일로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대학생 때 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다.

 

저 때는 1972년, 대학 2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서 있는 친구와는 대학 4년 동안 거의 붙어 있다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둘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 왔다갔다 했지만 친구가 우리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더 높았다. 입은 옷을 봤을 때 늦겨울쯤 될까, 장소는 면목동 우리집이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는 면목동에 단독주택을 하나 마련했다. 주택 사업을 하던 아버지 친구분이 지은 집이었다. 우리 다섯 형제는 저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내 20대와 함께 한 집이다. 저기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세를 살던 집이 날짜가 안 맞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비워 준 방 한 칸에서 옹색하게 여러 날을 살아야 했다. 대문에는 그 집 문패가 달려 있었는데 나는 별생각 없이 그 문패를 떼어내고는 내 이름이 적힌 새 문패를 달았다. 이 집은 우리 것이라는 일종의 시위였는지 모른다. 저녁에 그 집 아들이 퇴근하고 나서 난리가 났다.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말도 없이 남의 문패를 떼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달았다. 역지사지하면 나라도 화가 날 만했다. 며칠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경솔한 행위였다. 면목동 집과는 소란하게 인연을 맺었지만, 내 서울 생활 중 제일 오래 산 집이었다. 

 

집 가까이에 중랑천이 흘렀고, 중랑천과 집 사이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판잣집이 즐비했다. 당시 서울은 천변을 따라 어디에나 판자집이 있었다. 안방 창문을 열면 바로 판자집 지붕이었다. 밤이면 취객들의 고함과 싸우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선명하게 나누어진 빈부 주택의 경계는 그로테스크했다. 우리집도 좋은 집이 아니었지만 판잣집에 비하면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사람이 바로 코 밑에 있는데도 그러려니 여겼고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이 친구와는 입학하자마자 서로 절친이 되었다. 대학 4년은 물론이고 결혼한 뒤에도 오랫동안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결혼식 때는 서로 번갈아 사회를 봐주었다. 둘은 성격이나 취향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2학년에 들어서면서 친구와 나는 고시 공부를 하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우리는 국립 사범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졸업 후에는 자동으로 발령을 받았다. 취직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학 생활 1년을 보내고 나니 너무 허송세월 한 것 같았다. 도전 목표로 삼은 게 행정고시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1년여를 탱자탱자 하며 놀다가 다시 머리를 싸매고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책 보고 공부하는 거라면 둘 다 자신이 있었다. 방의 벽은 법조문이 깨알 같이 적힌 종이쪽지로 가득했다. 당연히 전공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바닥을 기던 학점이 더 아래로 떨어졌다. 만약 유급제가 있었다면 나는 졸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교련과 유신 반대 시위로 캠퍼스가 시끄러웠다. 걸핏하면 학교가 문을 닫았다. 딴짓을 하던 우리한테는 오히려 도움이 된 시국이었다.

 

그때 사회 정의를 위해 거리로 뛰어나가던 학우들에게는 아직도 마음의 부채를 느끼고 있다. 돌멩이를 드는 시늉만 했을 뿐 나는 방관자였다. 박정희 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길거리에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출세를 위한 잇속만 챙겼다. 그 시절 내 가슴은 사회 정의를 품기에는 너무 좁았다. 

 

어쨌든 나는 고시 공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를 했다. 그리고는 인생에 대한 의문에 빠져 철학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존재하고 왜 사는 건지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모든 게 의미 없었다. 그때 나는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뭔지도 모르고 읽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을 비롯해 플라톤, 니체, 쇼펜하우어, 헤겔, 사르트르 등의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혜의 갈증에 시달린 시기였고, 다른 무엇보다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는 게 첫째 과제였다.

 

친구는 계속 공부를 해서 1차는 합격하고 2차에서 몇 번 떨어지다가 군대를 가게 되면서 결국 도전을 접었다. 역시 고시는 만만치 않았다. 뚜렷한 목표 의식과 의지가 없으면 장기간을 버티기가 어렵다는 걸 나는 짧은 기간의 도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런저런 회의가 많은 나한테는 맞지 않았고, 그나마 주제 파악을 빨리 한 게 다행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교직으로 나왔고 - 머리로는 교직이 성에 차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 뒷날 친구는 장학사를 거쳐 교장이 되었다. 나는 아예 교장에는 뜻이 없었다. 마음 편하게 평교사로 지내자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가 장학사가 된 때부터 둘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 전처럼 관심사의 공유가 쉽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만나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둘이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일은 없다.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가 너무 많이 벌어졌다.

 

몇 해 전 광화문 광장과 검찰청 앞에서 양 진영이 세 대결을 했을 때 친구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진을 단톡방에 자랑스레 올렸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을 친구가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겠다. 동기들과 같이 어울려 당구치고 놀 때는 신나지만, 뒷자리에서 속 얘기가 나오면 장벽이 가로막은 듯 서먹서먹하다. 정치 견해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우리는 다른 점을 확인하다. 옛날에는 공통점이 많이 보이더니 지금은 반대로 되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우리의 대화는 자꾸 어긋난다.

 

현실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우정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우정 역시 기브 앤 테이크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을까. 관포지교(管鮑之交)나 금란지교(金蘭之交)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친구와 나 사이에는 공유하는 추억이 참 많다. 그러나 지금은 추억을 소환하는 일마저 심드렁해지고 있다. 

 

옛 사진을 보면서 한때의 시절인연을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서 내 대학 생활은 그나마 온기가 있었다. 다른 대타가 누가 나왔을지 모르지만 만약 이 친구가 없었다면 내 청춘은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을 말했고, 부처는 무상(無常)을 설파했다. 이 세상에서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없다. 교우관계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떠나가는 것은 붙잡지 않고, 다가오는 것은 마다 하지 않으며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여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일로써 어쩔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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