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박용도 선생님은 면목중학교에서 만났다. 그때 면목중학교는 막 개설된 학교였는데 형님은 개설요원으로 미리 발령받아 새 학교가 문을 여는 준비를 맡았고, 나는 3월의 정규 발령으로 갔다. 개설 학교의 첫 해는 학생이 1학년밖에 없으니 선생이라야 30명 남짓이어서 가족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개설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오래가는 편이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다. 지금은 다들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면목중학교는 첫해에 신입생이 입학했지만 교사(校舍)가 완성되지 않아 청량중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가을이 되어서 장안동의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 면목동에 없는 면목중학교여서 면목이 없다고 우리는 농담을 했다. 형님은 체육을 전공했고 학교 업무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교무주임이 교감으로 나간 뒤에는 후임 교무주임이 형님에게 돌아왔다. 그만큼 능력이 있고 상하간에 두로 신망이 깊었다. 마흔 즈음에 교무주임이 되었으니 교장이 되는 길은 빨리 열린 셈이었다.
형님은 후배를 잘 챙기기로 소문나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도 나를 많이 아껴주었고, 나 역시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선배였다. 나이는 열 살 정도 차이가 났다. 30년 넘게 교직 생활을 하면서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른 경우는 박용도 선생님이 유일했다. 우리 관계는 면목중학교를 떠나서도 15년 동안 이어졌다. 형님이 교장 승진을 앞두고 지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학년이 차고 식구가 늘어나면서 신임교사가 많이 왔다. 갓 대학을 졸업한 후배도 여러 명이 와서 우리는 한 팀이 되어 자주 놀러 다녔다. 주말에 주로 간 곳은 강화도였고, 경기도 일원은 이곳저곳 많이 찾아 다녔다. 방학이면 여러 날씩 여행을 떠났다. 어느 해 여름에는 후배 집 별장이 있던 만리포해수욕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전주에 갔을 때는 내 처갓집에 들러서 장인께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장인어른은 그때 국민학교 교장이셨다.
나에게는 면목중학교 시절이 선후배간에 제일 아기자기하게 지냈던 때였다. 그 중심에 형님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는 형님 친구들 부부 모임에 우리 부부가 함께 하기도 했다. 2박의 강원도 여행이었는데 그만큼 형님과는 허물없이 지냈다. 나이로 한참 밑이라 귀염을 많이 받았다. 대신에 설거지나 궂은일은 도맡아 했다. 그때 소양호를 지나는 다리를 지나다가 교통경찰에게 과속 딱지를 떼였던 기억이 제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그 다리 위를 지날 때면 교통경찰의 손짓이 떠오른다. 사람의 기억이란 묘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잊어버린 채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만 선연하다.
중고등학교 교내 체육대회에서는 반별 구기대회가 있다. 내가 담임을 맡았을 때 반별 대항 구기 종목은 핸드볼이었다. 마침 형님의 전공이 핸드볼이라 특별 훈련 부탁을 했다. 일요일에 아이들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켰지만 공을 처음 만져보는 아이들이 포메이션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형님은 가르치는 걸 포기하고 비장의 무기라면서 공이 손에 잘 달라붙도록 끈적이를 줬다. 다음날 공식 시합 전에 나는 아이들 손에 형님이 준 끈적이를 잔뜩 발라주었다. 그런데 코트에 나간 아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손에 잡힌 공이 떨어지지 않아 패스를 못하는 것이었다. 운동장에는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형님은 우리집에 들러서 식사를 자주 했다. 나도 망우리에 있던 형님 집에 자주 놀러갔다. 사모님 역시 중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다. 형님은 겉은 터프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스하고 속이 깊었다. 아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는 직접 낚았다는 커다란 잉어를 들고 왔다. 시장에서 사 온 것이 분명했는데 말은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전에 낚시터에 따라가본 바로는 강태공 수준이었지 월척을 할 실력이 못 되었다.
형님은 아내와 비교하면서 사모님이 반찬을 못 한다고 애교 섞인 불평을 했다. 사모님은 이 사람이 밖에서는 인기가 좋을지 몰라도 집에서는 빵점 남편이라고 눈을 흘겼다. 두 분이서 티격태격하는 레퍼토리는 늘 비슷했다. 형님에게는 유치원에 다니던 두 아들이 있었다. 얘들도 이젠 4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4년 만에 면목중학교를 떠났고 형님은 남았다. 한 학교 근무연한이 4년이었지만 필요하면 교장 재량에 따라 더 근무할 수 있었다. 나는 학교를 옮기고 얼마 안 돼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증상이 심해 거의 한 달 가까이 입원했다. 형님은 면목중학교에 있을 때 내가 담임했던 아이들을 수소문해서 열 명 정도를 데리고 문병을 왔다. 그만큼 세심하게 신경써 주었다. 사제 동반 야영을 나갈 때는 며칠씩 동행해주기도 했다. 형님은 보이스카웃 지도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캠핑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돌아보니 형님한테서는 일방적인 사랑만 받은 것 같다.
형님과는 사진이라는 공통된 취미가 있었다. 형님은 묵직한 니콘 F2 카메라를 애지중지했다. 나는 신형으로 나온 F3를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카메라는 최상급이었지만 솔직히 나오는 결과물은 시원찮았다. 그래도 같이 카메라를 둘러매고 사진 촬영회에 기웃거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한 번은 어느 사진 클럽을 따라 강원도 백담사로 촬영 여행을 갔다. 그날은 잿밥에 정신이 팔려 촬영보다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길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둘 다 부풀어오르는 방광을 참지 못해 수시로 버스를 세우는 통에 눈총을 받기도 했다.
호주(好酒/豪酒)가였던 형님을 떠올릴 때 술을 빼놓을 수 없다. 학교 부근 선술집에서부터 아가씨가 있는 술집까지 많이도 돌아다녔다. 술자리는 대부분 다른 동료들과 함께였다. 형님은 체육을 전공한 분답게 화끈했다.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일도 여럿 있다. 밤새 술을 마셔도 취해서 못 마시겠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어느 날 형님이 물었다. "너, 여자와 술 마셔서 이길 자신 있냐?" 여자와 술내기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퇴근 뒤 어느 허름한 술집에 갔더니 형님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투포환을 한 모 학교 체육교사라고 했다. 우선 체격에서부터 주눅이 들더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테이블에 소주병이 반도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항복했다. 속도전에 당할 수가 없었다. 투포환 선수 경력의 여선생에게 소주는 사이다와 같았다.
여자를 우습게 봤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탁구를 좋아하고 잘 친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여교사들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누가 제안했다. 탁구를 잘 치는 여선생이 있으니 시합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몇 점을 접어줄까?" 상대는 싱긋 미소를 띠더니 반대로 날 보고 열 점을 접으라고 했다. 당시는 한 세트에 21점을 내야 이겼다. 결과는 참패였다. 라켓을 갖다대면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나가서 도대체 서브를 받을 수가 없었다. 뱀이 꿈틀거리듯 공이 날아왔다. 뒤에 알고 보니 여선생은 중학생 때까지 탁구 선수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절감했다. 그날은 거하게 저녁을 살 수밖에 없었다.
형님의 십팔번은 '희망가'였다. 직원 회식 자리에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희망가'를 부르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남선생보다는 여선생이 형님을 더 좋아했다. 여자 입장에서는 푸근하게 감싸주는 오빠 같다고 할까, 오래 묵은 된장 같은 인간미가 풍겼다. 단점이라면 호오(好惡)가 뚜렷해서 아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대할 때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형님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도 꽤 있었다.
형님은 정치에서는 보수적이어서 종종 우리들과 논쟁을 벌였다. 전교조 운동의 초창기 때는 서로간에 접합점을 찾을 수 없었다. 강경파인 후배 Y가 있었는데 만나면 둘은 늘 티격태격했다. 어느 여름 가평천에 셋이서 피서를 갔다가 논쟁이 이는 바람에 일찍 텐트를 접어야 했다. 형님은 이념보다 현실을 냉정히 직시할 줄 알았다. "어쨌든 몸조심하거라." 헤어질 때면 형님이 항상 하던 말이었다. 그 당부 때문이었을까, Y는 해직 일보 직전에서 몸을 돌렸다.
창덕여중은 형님이 교감으로 마지막에 근무한 학교였다. 학교에 찾아가면 새로 생긴 여자축구부를 자랑했다. 전국에 있는 중학교에서 최초로 만든 팀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가 축구를 한다는 게 신기했다. 형님은 그때 이미 몸이 상해 있었다. 술도 끊은 상태였다. 학교 근무중에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는 일도 있었다. 좀 쉬라고 해도 괜찮다면서 버텼다. 얼마 안 돼서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형님이나 나나 전혀 몰랐다.
이 사진은 형님이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찍은 것이다. 교감, 교장이 되자면 석사 학위를 받는 게 유리했다. 가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때가 형님 나이로 40대 후반쯤 되지 않았나 싶다. 형님 묘소는 발안에 있었는데 몇 년 동안은 기일이 되면 찾아갔지만 곧 잊혀졌다. 이제는 찾아가도 싶어도 위치를 모르고 수소문해 볼 곳도 없다. 안타깝기만 하다.
박용도 선생님은 내 교직생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다. 살아있다면 이제 80대에 들어섰을 것이다.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진 아쉬움은 여전히 크다. 옛 사진을 보며 한 사람이 남긴 자취를 생각한다. 나에게는 지워질 수 없는 진한 흔적이다. 교장이 되어 소신껏 학교 경영을 해보는 게 당신의 꿈이었는데, 이젠 '이 풍진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오늘은 형님의 애창곡이었던 '희망가'를 꺼내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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